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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의 건강&생활] 할아버지의 오래된 트럭
김미림 기자 kimmirimm@ihalla.com
입력 : 2025. 07.16. 03:00:00
[한라일보] 시골에 혼자 사시던 외할아버지께 누가 쓰던 아주 낡은 트럭이 생긴 일이 있다. 농장 사잇길 같은 곳을 오가는 데 쓰기에 딱 알맞은 트럭이었는데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적이 없으셨다. 우리 가족은 정식으로 시험을 보시라고 할아버지를 응원했다. 실은 합격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운전을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설마 하던 일이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응원 아닌 응원 속에 진지하게 공부하시더니 여든을 넘긴 나이에 당당하게 운전면허 필기와 실기, 주행 시험에 합격하셨다. 그 뒤로 운전을 못하시도록 막는 데 더욱 애를 먹은, 마냥 웃지 못할 기억이 있다.

환자들과의 관계가 가장 위태로울 때가 운전을 그만두란 이야기를 할 때다. 미국에서는 차 없이 생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많아 운전을 못 한다는 건 더 이상 자립을 못 한다는 중대한 의미다. 대중교통이 구석구석 닿기 힘든 제주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분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운전을 그만두시라는 이야기를 어쩌면 치매 진단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내가 환자의 영원한 원수가 되는 것이다.

치매가 진행되면 기억력만 나빠지는 게 아니라 판단력이나 감정 조절 능력 또한 나빠진다. 사실이 아닌 일이나 별것 아닌 일에 집착하거나 과도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 한 환자가 그랬다. 치매로 요양원에 살게 되고 운전도 그만두게 되면서 오래된 차를 딸이 물려받은 것까지는 흔히 듣는 이야기였는데, 이분은 엉뚱하게 분노가 딸을 향하게 됐다. 탐욕스럽고 못된 딸이 자기 차를 빼앗아 갔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댄다는 것이다. 분명 아끼고 사랑하는 딸일 텐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참 속상한 일이었다. 이건 내가 대신 원수가 되는 게 백번 나은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어, 환자분께 이야기했다. 내가 시킨 일이다, 내가 치매 진단을 했고 운전을 못 하게 하라고 했다, 딸은 어쩔 수 없이 의사 말을 들었다고. 그 대가로 나는 한동안 환자의 악다구니를 들어야 했지만, 나를 매일 같이 원망하더라도 부디 딸을 향한 분노는 좀 줄어들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에도 최근 고령자 운전이 화두가 되는 것으로 안다. 운전면허 자진 반납도 받고 있다고 한다. 고령 운전, 특히 인지기능 저하가 있는 상태에서 운전은 위험한 것이 맞다. 하지만, 실제로 고령자가 사고를 낼 확률은 평균보다 약간 높은 정도다. 오히려 이십 대의 젊은 사람이 사고를 낼 확률은 몇 '배'로 높은데, 아무도 너는 젊으니까 운전대를 잡지 마라, 운전면허를 반납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고령 운전 문제는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개인의 능력과 상황에 맞게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12년 전 운전면허 시험 합격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할아버지는 이젠 우리 곁을 떠나셨다. 하늘나라에서 즐겁게 트럭을 몰고 다니실 할아버지를 상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이소영 하버드대학교 매스제너럴브리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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