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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일보] 딸아이가 아파 병원에 갔는데 접수처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옥신각신 말다툼이 이어지더니 중년의 남성이 화를 참지 못하고 한참 어린 창구 직원에게 욕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남성에게 손가락질하기 바빴지만, 옆 줄에 서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나로선 창구 직원도 딱히 잘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남성이 처음부터 무례한 건 아니었다. 절박한 표정으로 몇 차례 도움을 요청했지만 창구 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끝마다 쏘아붙이기만 했다. 그러자 "물어보는 것도 죄냐", "왜 여기서 이러느냐" 등등… 그렇게 출구 없는 대화가 반복되다 시한폭탄 터지듯 감정이 폭발했다. 야마구치슈·구스노키겐의 책 '일을 잘한다는 것'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의 뛰어난 감각 중 하나로 타인을 헤아려 살펴보는 능력을 꼽았다. 욕한 남성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창구 직원이 남성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살펴보려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병원 소동을 곱씹어보다 묘하게 올해 초 벌어진 추경 논란과 오버랩됐다. 제주도는 올해 2월 추경 재원이 여의치 않자 모든 부서에 예산 10%를 삭감하라고 지시했다. 삭감 대상으로는 민간경상보조·위탁사업 등이 거론됐다. 민생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들어 경기 회복을 위해선 하루빨리 공적 자금 수혈이 필요한데, 해마다 수천억원의 빚을 져 더 이상 돈을 끌어올 데가 없으니 시급성이 덜한 사업 예산이라도 깎아 그 돈을 정말 어려운 곳에 투입하자는 취지였다. 당장 '아랫돌 빼 윗돌 괴기식'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시민단체가 반대하고 의회도 나무라자 결국 없던 일이 됐지만 도정의 궁여지책을 마냥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민생만큼이나 재정 형편도 절벽에 몰려있다. 하지만 저간의 사정을 다 고려하더라도 누군가의 예산을 삭감하는 것에 포상까지 내걸 일은 아니었다. 도정이 '세출 예산 효율화'란 제목으로 각 부서에 보낸 공문에는 삭감 10% 목표를 초과한 부서에 포상금을 주고, 반대로 미달한 부서에는 페널티를 주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후 아니나 다를까 각 부서마다 실적 경쟁이 벌어졌다. 모 부서는 목표치 10%를 훌쩍 넘어 33%까지 삭감하는 계획을 세웠다. 애초 계획이 실현됐으면 민생이란 명분 아래 특정 민간단체는 예산이 삭감돼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예산을 칼질한 공무원은 그 공으로 상을 받고 주변 공무원의 부러움을 샀을테다. 엄밀히 따지면 상이 아니라 회초리를 맞아야 할 일이었다. 본 예산이 확정된 지 두 달도 안 돼 20~30%씩 '셀프' 삭감해야 한다면 그건 자신들이 예산을 잘못 짰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상을 줘야 하는가. 민생을 챙기는 김에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도 한 번 챙겨보길 바란다. 누군가의 슬픔으로 잔치를 벌일 생각은 가당치도 않다. 공무원 조직이 형편이 어려운 기업을 구조조정 해 실적만 챙기는 '기업 사냥꾼'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상민 정치경제부장>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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