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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16)조천읍 신촌리
너른 경지면적에 대대로 풍요 일궈온 마을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입력 : 2022. 09.23. 00:00:00
마을 이름이 신촌(新村)이라서 뜻 그대로 새로 생긴 마을 같지만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고려 때 현촌의 위상을 지녔던 곳이다. 그러한 사실은 원당봉 정상에 올라 동쪽 지역에 펼쳐진 마을의 모습을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화산섬이라 평지가 귀한 여건에서 이토록 넓게 펼쳐진 농경지가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한다.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그만큼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 넓고 길게 뻗은 들판이란 의미의 '진드르'로 대표되는 마을 이미지는 소출량을 중심으로 파악해 다른 마을들보다 상대적으로 얼마나 많은 풍족함을 누렸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도 마을 면적 769㏊에서 750㏊ 이상이 농경지이니 농업기반이 확고한 마을이다.

냇가는 종인천과 문서천이 있지만 모두가 건천이다. 설촌 당시에는 지금의 국도변 위로 인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차츰 물이 좋은 곳을 찾아 '큰물' 주변으로 이동하여 취락을 형성하게 됐다고 한다. 집들이 바닷가에 밀집해 있어서 아침이면 너른 농경지로 나가서 밭일을 하고 해지면 돌아오는 일상 구조를 이어온 마을이다. 포구가 있어서 어로활동을 하는 인구 또한 무시 못 할 정도이고. 지금은 도농복합형태의 마을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마을공동체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감동의 역사가 신촌리의 영혼처럼 느껴진다. 전국 어디를 가나 읍면 단위에 있는 중학교는 읍소재지 마을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조천중학교는 신촌에 있다. 사연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가서 살고 있던 신촌리 출신 재일동포들 중에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조규훈 선생을 중심으로 기금을 모아 학교를 지을 나무를 사서 고향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일본에서 온 큰 화물선이 좁은 신촌포구에 들어올 수 없어서 바다 가까운 곳에 그냥 던져놔야 하는 상황. 마을 청년들이 모두 바다로 헤엄쳐 나가서 그 엄청난 양의 나무들을 바다에서 뭍으로 밀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바닷가로 나가서 그 나무들을 끌어올리고 지금의 조천중학교 자리까지 달구지로 옮겨서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는 사연이야말로 감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교적 풍토가 강한 마을이라 교육열이 높아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것이다. 지금도 인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을 분위기는 그냥 하루아침에 이룩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고구봉 신촌이장께 후세에게 전할 최고의 마을 자부심을 여쭸다. 대답은 간명하다. "죽장 고찌"

'늘 함께'라고 하는 의미의 찰진 제주어 표현이다. 마을공동체 의식의 가장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진한 일체감을 신촌리가 추구하며 살아온 정신이라고 자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부에 나가서 살고 있는 출향인사들을 비롯해 마을 주민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 있었다. 신촌인(新村人)이라는 용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공동체정신 속에서 구현하는 의미로 읽힌다.

90년 전, 마을청년들이 모여 마소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연못을 직접 만들기 위해 300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하기 위한 방법이 특이하다. 청년회가 정보력을 발휘해 도박을 하고 있는 집을 급습해 완력으로 노름판의 판돈을 모두 압수하는 방식이다. 얼마나 지혜로운가! 모두가 친척처럼 다 아는 사이요, 적이 될 수 없는 입장이니 마을 사람 모두를 위해 쓸 돈을 강제로 빼앗겠다는데 순순히 응해야 했던 것. '늘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인데. 빼앗기면서도 웃고, 빼앗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그 판돈을 모아 땅을 사고 청년들이 곡괭이와 삽으로 엄청난 크기의 연못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농사에 필요한 마소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감동스토리의 마을이다. 그러한 사연들을 어린 시절부터 듣고 배우며 자란 덕에 출향인사들 또한 고향마을에 대한 애향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윗대 어른들이 좋은 본보기를 보여줬기에 가능한 일. 신촌리의 이러한 정신적 자산은 마을공동체가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라고 해야겠다.

아직도 포구와 인접한 마을 안길은 옛 취락구조의 형태를 대부분 그대로 간직한 정겨운 마을이다. 너른 농경지를 기반으로 생산된 여유를 인재를 키우는데 투자해 성공적인 미래를 열어온 마을. <시각예술가>



동가름 일뤠낭거리
<수채화 79cm×35cm>


가을날 오후, 등 뒤에서 쏟아지는 맑은 햇살이 돌담길을 눈부시게 한다. 길가 한쪽에 가옥과 잇닿은 돌담들이 공간 하나를 에워싸 있다. '일뤠낭거리 일뤠당'이다. 너무도 소박한 신전. 저 안에는 일뤠낭거리 일뤳도와 고동지영감, 짐동지영감이라는 신들이 모셔져 있다. 이 신들은 어선과 해녀들을 관장하는 어업수호신. 저 돌담 안에 네모난 돌로 만든 궤 안에 신의 몸이 좌정해 있다고 믿어왔다. 인근에 포구가 있으니 그럴 것이다. 수많은 그릴 대상을 놔두고 이곳 일뤠낭거리를 그린 것은 신촌리 마을공동체 문화를 느낄 수 있어서다. 당이라고 하는 것이 마을 밖 외진 곳에 모셔진 것이 아니고 주택가 집들이 밀집된 곳에 아무 거리낌 없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 무속이니 민속신앙이니 하는 규격화 된 용어로 설명하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 간절한 상황을 가진 사람들이 빌 수 있는 공간이라면 소중한 것이라는 의식. 바다는 늘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기에 사람의 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 할 수 있는 것. 빌며 의지해 안전을 얻고자 했던 순박한 마음이 정신세계 속에 흘러와 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가치관을 저 존재의 보존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어떤 믿음과 비는 마음을 배격해서는 안 된다는 묵시적 불문율을 보는 듯해 그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그렸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마을 풍토와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마을 사람 누군가 간절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공감대에서 오는 배려의 문화가 이것이다.





닥마루 바닷가에서
<수채화 79cm×35cm>


닭이 고개를 힘차게 들어 바다를 바라본다. 단순한 바닷가 기암괴석의 의미를 넘어선 강렬한 기백이 보인다. 조상 대대로 이 닥마루에서 숱한 상상의 나래를 폈을 이야기들이 파도소리처럼 끊임없이 철썩인다. 그림의 구성은 동양화의 요소를 가져왔다. 물감의 농담을 가지고 원근을 표현하면서 바다를 여백으로 삼았다. 닥마루의 특징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화면 구조는 위와 아래가 땅이며 그 사이가 바다. 파격적인 구도 속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그려서 여백이라는 바다를 유추하고 상상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다는 어떤 경우든 일시적이지 않으며, 멈추지도 않으니 저 닥마루가 맞이해온 수 십 만년의 바다시간이 저 빈 공간에서 기억돼 넘실거린다. 구체성이 앗아갈 수 있는 소중한 진실은 그리지 않는 것이 더 의미 있을 수 있기에. 햇살이 강렬하다. 저 바위는 일정량 달궈져 있다. 맨발로 디디고 서면 뜨거울 정도다. 신촌리의 경관을 대표하는 닥마루. 어떤 자부심이 엿보인다. 부끄럽지만 필자가 돌조형물과 관련해 수 십 곳에 작품을 만들어온 경험이 있다. 닥마루는 저 닭의 머리 형상을 둘러싼 암반의 형태가 모두 조형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라고 하는 재료로 형상화 할 수 있는 시각적 방식이 대부분 망라돼 있음을 이 분야와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직접 가서 확인하셔도 좋다. 해안 언덕이 주는 시원한 맛과 함께 주변 요소요소에 널린 추상적 형상을 만끽 할 수 있어 무척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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