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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사랑의 역사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입력 : 2022. 09.16. 00:00:00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어떤 기억들은 상처의 흔적처럼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남는다. 성급하게 떼어버린 딱지는 모양 없는 문신처럼 몸과 마음의 일부로 함께하게 되는데 그걸 볼 때마다 후회와 함께 이상한 그리움에 잠기곤 한다. 내가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때의 나의 말은, 행동은 과연 옳았던 것일까. 아니 도대체 나는 어쩌자고 그랬던 것일까. 그런데 그토록 아팠던 상처가 지금은 왜 나의 무늬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잊으려 했던 것은 잊혀지지 않고 추억하고 싶은 것들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은 내가 넘겨버리고 만 페이지를 다시 들춰보지만 멈추게 되는 페이지마다 찾아 헤매는 문장은 보이지 않는다. 사랑의 역사는 내가 만들었지만 사실은 여전히 모르는 것들로 이루어진 미완의 서사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다소 충동적인, 감정에 솔직한 여자 율리에의 사랑 이야기다. 모든 사랑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이 영화는 나를 찾기 위한 율리에의 여정에서 그녀가 머무르는 사랑의 장소들과 시간들 그리고 그 시공간을 함께한 사랑의 상대들과 그 모든 변곡점에서 출렁이던 율리에의 감정들까지 모두 소환해내는 집요한 작품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12개의 챕터로 구성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그 구성처럼 누군가가 써 내려간 것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의 역사:율리에 편'은 흔하고 진부한 연애 소설 같기도 하고 드물게 솔직하고 성실한 일기장처럼도 느껴지기도 하는데 사실 그 두 가지 감상은 모두 개인적인 것이라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 또한 아마도 읽는 이의 서사가 그 리트머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는 크게 공감하며 탄식할 이야기고 누군가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이야기. 나는 탄식하며 입술을 깨문 쪽이었다. 나와 율리에는 너무도 다르지만 우리가 어떤 순간 똑같이 옳았고 틀렸다는 걸 발견하자마자.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율리에는 낯선 사랑에 끌리는 순간 또한 겁내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율리에는 마치 탐험가처럼 보인다. 안전한 길이나 보장된 미래는 그녀에게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듯하다.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길을 내는 쪽의 사람이고 탐색하기보다는 탐닉하는 유형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에 풍덩 빠지지만 그 사랑에서 힘들게 빠져나오고 빠져나온 뒤 다시 그 사랑의 웅덩이로 기어코 발을 들이는 율리에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다. 영화의 원제는 '세상 최악의 인간'이다. 누구도 율리에를 보며 '너는 세상 최악의 인간이야'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아마도 율리에는 여러 번 스스로 되뇌었을 말일 것이다. 나는 정말 최악이야. 사랑이 뭐길래 율리에는 그리고 우리는 무리수인 것을 알고도 은폐하고 자충수를 둬서라도 그 순간에 갇히고 싶었을까.

 사랑의 역사는 쉽게 쓸 수 없지만 언제라도 쓸 수 있는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다. 어렵게 쓴 첫 문장이 혼돈의 물음표와 격한 느낌표를 거쳐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우리는 여러 차례 반문한다. 내 사랑이 옳았는지, 이 사랑이 끝난 것인지 그리고 그 사랑이 끝인 것인지.

가장 보통의 연애를 했다고, 누구와도 다를 것 없는 그냥 사랑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입가에 걸린 표정이 단순하지 않음을 사랑을 했던 모두는 알고 있다. 이 영화의 엔딩을 보면서 나는 씁쓸하고 달콤한 내 흉터의 무늬들을 떠올렸다. 어떤 방식으로 훼손되었건 그 덕에 새겨진 이야기들이 밉지만은 않았다. 이 기묘한 애틋함은 아마도 또 다른 무늬를 새길 것이라 무섭고 또 설렜다.

<진명현 독립영화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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