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름 도원리의 ‘도원’ 오늘 무릉리의 ‘무릉’ 합쳐 풍요로운 이상향을 마을 이름으로 가져온 ‘무릉도원’ 내력 깊은 마을이지만 문화정체성 민생현안 뒤처져 제주사람들 사이에는 속담처럼 전해오는 이런 말이 있다. '제일 강정 제이 번내 제삼 도원'이 경구처럼 전해오는 민중의 레토릭이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세 마을은 제주에서 쌀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곳을 가리킨다. 강정이야 오늘날 강정마을로 불리는 곳이고 번내는 안덕면 화순리를 이른다. 마지막 도원은 신도리와 무릉리를 하나로 뭉뚱그린 지명으로 근대식 행정편제가 시행되기 전에 두 마을이 도원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한 마을이었을 당시의 명칭이다. 옛 이름 도원리의 '도원', 오늘날 무릉리의 '무릉'을 합치면 누구나 잘 아는 무릉도원이다. 풍요로운 이상향을 마을 이름으로 가져왔으니 무릉1리를 도원경이라고 여겨도 눈을 흘길 사람은 없을 만하다. 벼농사가 힘든 섬에서 소위 '곤 밥'을 배불리 먹던 마을이니 당연하지 않는가. 무릉향사 내력이 깊은 만큼 무릉1리에는 유서 깊은 마을명소와 그에 따른 사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제주의 마을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설촌 수호신을 모신 본향당이 무릉1리의 역사지 중 으뜸이겠다. 무릉1리 본향당은 '물동산 일뤳당'으로 불린다. 이 당에는 대정읍 하모리의 '문수물당'에서 가지 갈라온 '문수물한집할망'을 모신다. 신당의 명칭 속에 '일뤠'가 들어있어서 음력으로 매달 7, 17, 27일에 찾아가 기원을 올린 곳이다. 과거와 달리 이 당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지만 여전히 몇몇 주민들은 정성스레 찾아가 지극한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원을 올릴 때에는 메 2기, 물색(삼색 천), 지전, 명실(실타래), 삼색과일, 제주(祭酒) 등을 진설한다고 한다. 본향당 어귀에 세워진 비문에 따르면 1835년에 마을에 돌림병이 창궐해서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하자 마을포제를 시작했고, 2년 뒤에는 하모리의 문수물당을 가지 갈라왔다는 사연을 지니고 있다. 무릉1리 방사탑 모동장의 옛터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무릉1리사무소 옆 골목 안에 고색창연한 옛 집이 솟을대문까지 갖추고 길손의 이목을 잡아끄는데 이곳이 바로 무릉향사이다. 무릉향사는 말 그대로 봉건시대의 마을회관이며 마을사람들이 대소사를 공론하는 것은 물론 학문을 수양하던 선비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기와집의 풍모를 지닌 이 향사는 본래 안성리에 자리했던 대정현의 객사를 해체해 이 자리로 이설해 온 것이라고 한다. 무릉1리 향사 복원비문에 따르면 1989년부터 이듬해까지 2년에 이설해 완공했다고 한다. 향사 부지 안에는 두 채의 건물과 고풍에 어울리는 나무들이 웃자라고 있어서 운치를 더욱 깊게 만든다. 무릉1리 본향당 물동산일뤳당 황금진 노인회장 고지영 사무장 오늘날 제주는 내력이 깊은 마을일수록 문화정체성과 각종 민생현안에서 뒤처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무릉1리의 사정도 비슷하다. 물론 이 마을은 무릉도원으로 소문났던 곳인 만큼 비 온 뒤에 땅이 더욱 단단해지듯이 금세 위용을 되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무릉도원, 그 도원경은 붉은 노을에 물들어 금빛 들녘으로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글·사진=한진오(극작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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