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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순환선-이도훈
강다혜 기자 dhkang@ihalla.com
입력 : 2020. 01.01. 00:00:00

그림=최현진

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死因)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 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렸고

생전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 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만 책들의 뒷부분은

다 백지상태였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순환선에서 내려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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