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최현진 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死因)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 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렸고 생전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 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만 책들의 뒷부분은 다 백지상태였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순환선에서 내려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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