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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공원 아버지 위패가 무슨 죄를 지었나"
제주4·3연구소 '그늘 속의 4·3, 그 후 10년' 증언본풀이 마당
희생자·후유장애인으로 인정되지 않은 경험자 3명 증언 나서
송은범 기자 seb1119@ihalla.com
입력 : 2019. 03.29. 18:22:33

증언에 나선 정순희 할머니.

"꽃을 사들고 아버지가 모셔진 4·3평화공원에 갔는데 위패가 난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3일을 계속 울었어요."

 올해 나이 일흔 아홉의 김낭규 할머니는 70년 전 아버지를 잃었다. 제주 신촌국민학교 선생이었던 아버지가 4·3의 광풍을 피해 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한 것이다. 김 할머니의 아버지는 4·3희생자로 인정돼 평화공원에 모셔졌지만 이후 극우단체에 의해 위패가 내려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김 할머니가 수 십년 동안 숨죽여 감춰왔던 얘기를 어렵게 꺼냈다. 제주4·3연구소 주최로 열린 '4·3증언본풀이 마당'을 통해서다.

 '그늘 속의 4·3, 그 후 10년'이라는 주제로 29일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 열린 이번 행사는 희생자로 불인정되거나 희생자로 인정됐지만, 후유장애인으로는 인정되지 않은 4·3 경험자들이 증언자로 나섰다. 김낭규 할머니를 시작으로 4·3 당시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나섰다 바위에 깔려 평생 허리가 굽은 채로 살아야 했던 강양자(77) 할머니, 13살 어린 나이에 물고문도 모자라 전기고문까지 당해 현재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정순희(84) 할머니가 차례로 증언에 나섰다.

 

증언에 나선 김낭규 할머니.

김 할머니는 "아버지는 총살되기 전에 경찰에 연행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촌리 마을사람들이 탄원서를 제출해 아버지를 석방시킬 만큼 평판이 훌륭한 분이셨다"면서 "아버지가 사람을 죽인 것도, 불을 지른 것도 아닌데 왜 위패가 내려진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희생자 추가 신청을 접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증언에 나선 강양자 할머니.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후 제주 광령리에 살던 강양자 할머니는 8살이던 1948년 밭일을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 외할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다 변을 당했다. 어두운 밤 중에 외할아버지를 찾다가 넘어져 바위에 깔리면서 허리에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후 평생 허리가 굽은 채로 삶을 이어가면서 4·3후유장애인 신청을 했지만 번번히 거절을 당했다. 강 할머니의 호적 상 나이가 다르고, 겪고 있는 장애가 4·3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강 할머니는 "왜 구차하게 거짓으로 후유장애인을 신청하겠나"라면서 "4·3 때문에 한 여자가 날개 한 번 제대로 피지 못하고 인생이 망가졌는데, 오히려 국가는 나를 의심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증언에 나선 정순희 할머니.

서귀포시 강정동에 살던 정순희 할머니는 13살이었던 1948년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 됐다는 이유로 셋째 언니와 함께 경찰에 잡혀가 물고문에 전기고문까지 당했다. 특히 어머니는 서북청년단에 의해 공개 총살을 당했는대, 소녀였던 정 할머니도 그 현장을 목도했다. 이후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을 고통스러워 했지만 '확인되는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정 할머니는 "나는 죽겠는데 진단서만 갖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병원 갔더니 사지가 절단 되거나 총에 맞은 상처 등 눈에 보이는 상처가 없어서 진단서를 끊어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며 "4·3이 모두 해결된 것처럼 나오는 뉴스를 보면 신경질이 난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번 본풀이 마당을 주최한 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은 "이들의 증언이 슬픔으로 그치는 자리여선 안된다"며 "용기와 희망의 자리, 당당하게 희생자의 이름에 올릴 수 있어야 한다. 4·3연구소도 이들의 이름이 희생자 명단에 오를 때까지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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