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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0주년 아픔을 넘어 미래로-5 / 제1부 4·3의 현주소] (4)점차 사라지는 현장
도시확산·부동산 개발 열풍에 훼손·멸실 우려 현실로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입력 : 2018. 03.06. 20:00:00

완전히 해체되기 전 뒷골장성 성담 모습.

흔히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도 시간이 흐르면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기 마련이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현장이다. 역사현장이 중요한 이유다. 아픈 역사현장을 통해 교훈을 얻고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올해 70주년을 맞이한 제주4·3 유적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무관심속에 대부분 방치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화와 부동산 개발열풍이 4·3유적의 훼손과 멸실 위기로 내몰고 있다. 상당수 유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멸실 위협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주민들이 쌓은 마을 전략촌이나 방어성, 주둔소 등 4·3성은 개발붐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제주시 한림읍 상대리 속칭 진동산 일대. 이곳에는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뒷골장성'이라는 4·3성이 남아있었다.

뒷골장성은 1948년 말에서1949년 초 사이 인접마을 뿐 아니라 해안마을 주민들까지 동원돼 쌓은 성이다. 이 성은 한림읍 전체를 방어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견고하게 축성됐다. 지역민이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한림장성'으로 부를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4·3성 가운데 유일하게 읍 전체를 두른 성으로서 역사적 중요성이 컸다.

그런데 견고했던 성담 대신 최근 건축한 타운하우스 몇 채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거대했던 성담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뒷골장성 성담이 허물어진 모습.

이곳과 2~300여m 떨어진 경작지에 성담 일부 만이 남아있다. 성담이 훼철되기 전 있었던 제주4·3유적지(진동산 뒷골장성) 안내 표석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표석엔 "귀덕4리에서 월령리까지 거의 10㎞에 이르는 석성을 쌓았다. 성은 폭 3m, 높이 5m로 가장 견고하고 거대하게 축성됐다. 현재 성은 길이 1㎞, 높이 3m, 폭 4m 정도 남아있다. 이 성은 회곽도 구조는 물론 총구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뿐이었다. 개발붐이 일면서 하나둘씩 사라져가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도시의 팽창과 확산과정에서 4·3성이 위협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제주시 인다마을 4·3성이다. 인다마을 4·3성은 축조 당시 동서 150m, 남북 200m 규모였다. 소개령에 의해 마을을 떠났던 아라동 주민들이 돌아와 1949년 5월경 재건한 성이다. 이 성은 현재 원신아파트 북쪽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길이 20m, 높이 약 1~1.5m 정도 남아있다.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지속적인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진 탓이다.

성이 완전히 허물어진 현장에 4·3유적지 표석만 남아있다. 현재 안내 표석은 사라지고 이 일대엔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한라일보DB

고층 건물들 사이로 낮게 이어진 성은 도심 속 고도라고나 해야 할까. 점차 사라지는 4·3유적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나마 20m 정도라도 남은 것은 아라동통장협의회를 비롯 주민들의 노력이 컸다. 2009년 택지개발로 훼철될 위기에 처하자 4·3의 아픈 역사현장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이 여긴 주민들이 흔적만이라도 보존하자고 나선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2014년 12월 세운 표석이 인다성의 수난사를 말해준다.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을 비롯 대부분의 4·3성이나 주둔소 등도 마찬가지다. 마을 주변이나 경작지를 중심으로 남아있는 4·3성 등은 개발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도 전체적으로 4·3성의 구축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만리장성을 연상케 하는 12만여m를 축성했다"고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대규모로 축조됐다. 제주읍(현 제주시)의 경우 사라봉 등대에서 도두봉까지 연결하는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인다마을 4·3성은 지속적인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져 현재 원신아파트 북쪽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길이 20m, 높이 약1.5m 정도만 남아있다. 강희만기자

마을 단위로 연결하다보니 그 길이는 상당했다. 4·3성을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도민들이 동원돼 고초를 겪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당시 상황을 기술한 '진중일기'엔 "제주 역사상 가장 큰 작업"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럼에도 4·3성 축조실태와 규모 등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03년 제주도와 제주4·3연구소 등이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펴냈으나 어디까지나 기초조사에 불과하다. 당시 조사에선 4·3유적이 모두 597곳으로 파악됐으나 상당수가 훼손되고 있었다. 그 후 15년이 지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사유지에 들어선 4·3성은 훼손·멸실해도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제주도는 2009년 '제주특별자치도 4·3유적지 보존 및 관리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조례 자체가 사실상 선언적 의미에 그치면서 실질적인 조치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는 없는 실정이다.

도 전역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구축현황과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기록화 작업과 함께 현실적인 보존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중요 유적이나 현장에 대해선 보존과 정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방안을 고민해 나가야 한다.

이와 관련 제주도 4·3지원과 관계자는 "올해 4·3유적에 대한 추가조사와 함께 이를 토대로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보존대책을 강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자문위원=문성윤 변호사, 박명림 연세대교수, 박찬식 제주학센터장, 양윤경 4·3유족회장/특별취재팀=이윤형 선임기자, 표성준 차장, 송은범 기자>



4·3성, 비극적 역사와 혼란스런 시대상 상징


제주도와 제주4·3연구소 조사에선 4·3유적이 모두 597곳으로 파악됐다.

유형별로는 잃어버린 마을 108곳을 비롯 ▷4·3성 66곳 ▷은신처 35곳 ▷학살터 152곳 ▷은신처 및 희생터 10곳 ▷수용소 18곳 ▷주둔지 82곳 ▷희생자 집단묘지 6곳 ▷비석 41곳 ▷역사현장 62곳 ▷기타 17곳이다.

이 가운데 4·3성은 지서를 방어하기 위한 지서성, 마을마다 경비와 통제를 목적으로 한 전략촌성, 토벌 목적으로 산간 요충지마다 쌓은 군경주둔소성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4·3성은 4·3의 전개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략촌성은 주민 집단희생기에 집중적으로 축성된다.

주민 집단희생기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된 1948년 10월11일부터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는 1949년 3월2일 이전까지다. 4·3 전개과정에서 가장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된 시기다.

대부분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타는 등 초토화작전이 전개된 것도 이 시기다. 주로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해안마을을 중심으로 4·3성이 구축됐다.

이후엔 중산간 지역으로 공간적 범위가 확장된다.

중산간 지역에 전략촌성 등이 구축되면서 소개된 마을재건과 토벌대의 작전 수행을 위한 전진기지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한다. 선흘리 낙선동성 등이 해당된다.

군경주둔소 성은 토벌대의 침식과 주민들과 무장대와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주요 길목을 중심으로 쌓은 성이다. 군경주둔소 성은 6·25전쟁 발발 이전부터 무장대의 활동을 제한하고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각 경찰서별로 설치하기 시작했다.

1952년 4월에 전도에 걸쳐 32개의 군경주둔소 성이 구축되고 있었다. 제주도가 등록문화재 등록을 추진중인 수악주둔소, 시오름주둔소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4·3성은 해방공간에서부터 4·3사건과 6·25전쟁 및 이후까지 이어진 비극적인 역사와 혼란스런 시대적 상황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이 크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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