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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의 에세이로 읽는 세상] 눈 오는 밤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입력 : 2018. 02.07. 00:00:00
펑펑 내리는 눈이 하늘과 땅과 들을 뒤덮고 있다. 함박눈이 분분히 날리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 지상이 온통 고요와 평화로 가득한 느낌이 든다.

눈 내리는 밤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저렇게 찬란하고 아름답고 순정하게 내리는 눈을 혼자 내버려 두고 어찌 잠을 잘 수 있을 것인가. 창밖에서 눈은 밤새 사락사락 그침 없이 내린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오디오에서 애절한 음악은 그칠 듯하다 다시 이어진다.

눈 내리는 밤에는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밤 숲속에 머물며'가 생각난다. 시인은 그믐달 눈 내리는 숲을 지나다가 발길을 멈춘다. 눈 오는 밤의 숲은 너무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숲은 깊고 어둡고 아름답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도 세상과의 약속을 떠올리고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나선다.

눈 내리는 밤을 노래한 시인이 어찌 서양에 그칠까. 김광균은 '설야'에서 "어느 머 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라고 눈 내리는 밤을 노래했다.

아름다운 눈 내리는 풍경을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눈 내리는 밤에 나는 이 세상 인류의 한 사람이다. 아무에게라도 전화해서 "거기에도 눈이 오나요?"라고 묻고 싶다.

눈 내리는 밤의 풍경을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을 보고 있으면 축복, 기쁨, 사랑, 고요, 용서와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렇게 인간을 감동시키고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한다.

세상을 따뜻이 덮어주듯 푹푹 내리는 눈송이는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감싸 안아주는 어머니의 손길 같다. 멀리서 온 즐겁고 반가운 편지 같은 눈송이들은 겨울 저녁 식탁을 정성스레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만큼 온화하고 정겹다.

흰 눈이 내리는 날은 아이도 울리지 말라고 했지만,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모든 어둠과 불의가 없어지길 소망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도 이 순간에는 정말 선의와 축복의 마음을 가졌으면 하고 두 손을 모아본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사람들이 마음을 한데 모으면 맑은 하늘에서도 눈이 내리게 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 저렇게 밤새 내리는 눈도 이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거두어들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한데 모인 것이 아닌지.

축복과 화해의 눈이 산과 들 너머로 이어지면 세상 어디에선들 전쟁과 갈등과 가난이 있을 것인가. 총을 겨누며 대치하고 있는 남과 북에 국경선과 철조망이 왜 있으며, 종교와 이념의 희생물이 된 채 자기 나라를 떠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유민이 왜 있으며, 가난과 기아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왜 있을 것인가. 순백의 눈이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지우는 날은, 어디서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을 하나의 마음으로 묶어 즐 것이다.

외투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가본다. 머리 위로는 흰 눈송이가 축복같이 날리고 눈 속에서 헤매던 새들이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눈과 어둠 속에서 다니다 이제야 자신들의 둥지를 찾아가는 길일 터이다. 인간은 모두 저마다의 평안한 집에서 안식하고 있지만, 들판의 짐승과 새들은 추운 날 밤에 편히 쉴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일까. 이 삭막한 세상 어디에서도 만만하게 둥지를 틀만 한 곳도 없거늘 새들이 저렇게 인간과 자연을 위해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새하얀 눈꽃들 속에서 세상은 자꾸 어둠에서 밝음으로 바뀌어 간다. 어둑새벽 눈 내리는 숲에서 평화롭고 고요한 세계와 하나가 되어 본 적이 있는가. 고달프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 지상의 모든 사람에게 눈꽃처럼 행운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빌어 본다. <문학평론가·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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