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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98)제주시 애월읍 고성1리
외세에 항거했던 항파두리 혼… 자랑이자 아픔이 된 역사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6. 08.23. 00:00:00

아직도 더디게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항몽유적지 모습(위)과 마을회관 옥상에서 항파두리 토성 지역 방향으로 바라본 전경(아래).

1978년 유적지 문화재 지정 후 주변 개발 등 제한
"삼별초 정신 등 담아 인근에 고려촌 조성하고 싶어"
마을 운동장에 초등학교 유치 등 새로운 변화 꿈꿔



항파두리 토성에 오르면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아시아와 유럽, 아랍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몽고에 항거하여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혼이 남아 있는 곳. 역사를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후세에게 감동을 주고, 새로운 역사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싸우면 죽을 것이 확실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던 주인공'들에 의해서 이룩되는 경우가 많다. 여몽연합군의 군사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던 삼별초가 무모한 항전을 펼친 것은 단순하다. '살기위한 굴복은 싸우다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고려 무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비롯했으리라. 삶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죽음.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자들과 싸웠으니 항파두리는 세계사의 한 자락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 기백이 세계인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보여 줄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부심에 비하여 현실은 너무 초라하다. 이기는 길만을 찾은 약아빠진 세상에서 항파두리는 외로워 보인다.

삼별초가 주민들을 동원해 흙으로 축조한 토성의 모습.

애월읍 여러 마을을 탐방하면서 설촌 유래를 듣다보면 항파두리의 역사와 연결지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지명들 또한 김통정 장군이 토성을 쌓고 항전하던 시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녹아있다. 어찌 생각하면 김통정부대의 입도는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성을 쌓고 싸우는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제주인들에게 힘든 노역과 살벌한 전쟁명분이 주입되었으며 군사력에 필요한 다양한 시설과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했을 터이니. 항파두리는 변화의 장이었으며 격동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행정 구분의 입장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생활 터전이었던 의미로 고성1리는 마을 자체가 항파두리 토성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사성이 마을 이름이 된 것. 아이들은 할아버지에게서 수 없이 김통정 장군과 삼별초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고 그 아이들이 할아버지가 되면 다시 손자들에게 들려주며 살아온 마을. '왜 저런 흙더미로 된 성이 있냐?'고 물으면 답을 해줘야 할 의무(?)가 어른들에겐 있으니까. 항파두리의 삼별초 정신은 고성1리 조상들의 공통분모가 되었던 것이다. 마을원로인 김세호(84)어르신은 "원래 상귀하고 한 마을로 살아오다가 분리되었습니다. 4·3 이전에는 초등학교도 있었지만 그 광풍의 여파로 사라진 뒤로는 다른 마을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지요." 라고 설촌의 역사를 전했다.

강봉직 이장

강봉직(48) 이장이 밝히는 고성1리의 문제점은 이렇다. "1978년 항파두리성이 문화재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후로 38년 동안 낙후된 마을로 멈춰선 것입니다. 항파두리성 저 너른 면적 인근에 어떤 개발도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주민들은 차츰 희망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지요. 이런 피해를 보면서 살아온 억울함에 대하여 면전에서는 공감한다고 하면서 어떠한 실질적인 해결방안도 마련하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에 박정희 대통령까지 다녀가면서 엄청난 성역화 사업이 이뤄진다고 하니까 마을 전체가 관광지가 될 것으로 알고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정작 주민들에게 다가온 것은 문화재 지역 인근에는 건축 행위 등 엄청난 규제와 제약요인이 발생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세대가 넘는 동안 주민 피해 위에 항파두리는 놓여 있는 것입니다. 문화재라고 하면서 성 안에 농지를 최근에야 겨우 50% 매입했다고 하니 38년 동안 어떤 시각으로 행정을 했다는 것이 나와 있는 것 아닙니까? 보상 가격도 주변 시세보다 엄청 싸게 사면서 말입니다." 울분을 토로하고 있었다. 충격적인 것은 문화재로 묶은 토성 내부 토지는 이미 문화재청 예산으로 사들여서 발굴 작업 등을 마치고도 남을 38년 세월이었다. 조금 격한 표현으로 '죽도 밥도 아닌 문화재 행정'으로 주민 피해만 양산시킨 결과라는 것이다. 출발부터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관주도로 엉겁결에 나가다보니 생긴 일들이 속출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너른 면적이 문화재로 묶이면 마을 주민들에게는 보상차원의 생업 발전 방안이 모색되어야 함에도 말이다.

학교가 유치돼 초등학생들이 뛰놀았으면 하는 마을 운동장.

이용미(53) 부녀회장에게 '100억이 하늘에서 무릎에 떨어져 마을 발전을 위한 사업을 하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항파두리와 마을이 인접한 곳에 기와집이 즐비한 고려촌을 만들고 싶습니다. 관광객들이 당시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느낄 수 있는 공간과 함께 고려의상을 입은 사람들의 깜짝 공연과 삼별초의 무술 시범 등 마을회가 수익을 낼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게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오랜 기간 주민들이 꿈꾸고 현실로 만들고 싶어서 내놓은 이야기들을 축약해서 설명하는 것 같았다. 항파두리와 같은 세계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드러낼 상품성 있는 곳이라면 첫단추를 주민들과 함께 관광마인드를 가지고 치밀하게 짰어야 했던 것이다. 문화재청 연구 대상으로만 바라볼 항파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늦지 않았다. 38년을 고성1리 주민들에게 서러움을 준 보상 차원에서라도 행정과 정치가 나서서 항파두리 고려촌 건설을 지원해야 한다.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 아래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마을 할머니들.

강위진(74) 노인회장의 꿈은 "학교가 고성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일전에 제주시에 어느 고등학교가 외곽으로 이설하고자 했을 때, 주민들이 공감을 못해서 이루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노력해서 우선 마을운동장에 초등학교라도 생겼으면 합니다." 이는 김경수(42) 청년회장이 밝히는 현실과 상통하는 현실이다. "읍면 청년회 체육대회에 나가면 초등학교가 있는 마을과 없는 마을 차이가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선수가 모자라서 쩔쩔매는 곳은 초등학교가 없는 마을입니다." 고성1리 마을 소유 운동장에 초등학생들이 뛰놀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제주 역사의 한 획을 보유하고 있는 항파두리가 결사항전을 펼칠 대상은 무엇일까? 주민 피해는 눈여겨보지 않는 문화재 행정이다. 상생방안이 절실하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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