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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68)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
터전은 아늑하고 ‘향약’이 공동체를 이끄는 가족같은 마을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5. 12.08. 00:00:00

마을회관 옥상에서 바라본 달산봉과 제석오름(위). 평화로운 마을포구와 해변 전경(아래).

약 500년전 설촌… 표선면 동쪽끝 자리한 전형적 시골마을
자연자원 마을 공동자산… ‘주민 결속력 제주섬 최고’ 평가
조선초 마을 침입 왜구 막아낸 역사적 기록 마을 자랑거리
주민 "자연경관과 공동체 정체성 유지하는 전원마을 꿈꿔"



'매역허지'라고 하는 풍습이자 마을 규약이 있었다. 자라는 기간 동안 미역 채취를 금했다가 어느 정해진 날을 기해서 금했던 것을 해제한다. 이 날은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모여들어 미역을 따는 것. 하루 수확량이 대단했다. 마을 남녀노소 대부분이 바다로 나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운반 작업에서부터 갯바위 틈에 있는 미역을 따는 일도 행복한 수확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학교에서 임시휴교를 할 정도로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였다. 바다에 들어갈 때도 '들어가라'는 신호에 따라 동시에 들어가야 했다. 해가 저물고 미역 채취 작업이 끝나면 마차나 등짐으로 집까지 운반하고 거동이 불편한 동네 어른들의 집이나 해녀 일을 못하는 집에 조금씩 나누어 주는 날. 바다 속 미역들을 마을 주민들의 공동 자산으로 생각하는 불문율이 행복을 생성시키던 마을. 지금에야 외부에서 들어와 집을 지어서 살기 시작한 주민들은 그러한 마을공동체문화의 희열을 알지 못할 것이다. 금수저라 할지라도 국 맛을 모르듯이. 지금도 마을 향약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외부적으로 가장 강력한 마을 결속력을 발휘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끼리는 티격태격 하는 일이 있어도 마을과 마을끼리 경쟁을 하거나 다툼이 있을 때 가족의 일처럼 모여들어 대응하는 단합심은 아직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마을이다.

천미천이 바다를 만나기전 하천리와 신천리의 경계를 이룬다.

번영로가 표선에 도달하기 전 하천리 가운데를 지나간다. 동쪽에 달산봉과 제석오름이 주봉을 이루면서 천미천 서쪽을 따라 바닷가까지 주거 공간 대부분이 이어진 마을. 표선면 동쪽 끝 마을이다. 신천리와 신풍리를 경계로 성산읍과 잇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성읍리와 인접하였다. 서쪽에 가시리와 표선리가 위치한다. 상동(묶은가름), 중동(방상동네), 하동(넓밭) 3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 어르신들이 전하는 설촌의 역사는 약 500년 전 지금 상동 윗뱅뒤 동산 덕거리에 위씨가 설촌 하였다고 전한다. 정의현 시절에는 좌면(지금의 성산읍)에 소속되어 있다가 1914년 표선면에 편입. 옛 이름은 '냇끼'다. 원래 하천, 신풍, 신천 지역을 천미촌 혹은 천미리라고 불렀다. 냇가의 끝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던 시기에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천미포에 왜구가 침입해 왔던 일. 조선 명종 7년(1552년) 천미포(신천리 동쪽 해안) 속칭 구진개로 쳐들어온 왜구를 백성들이 힘을 합쳐 싸우는 한편 관군이 지원이 있을 때까지 막아낸 기록이다. 사진리, 화공소, 추군머들 등은 이로 인한 지명들이라고 한다. 달산봉과 제석오름이 이어진 느낌을 주면서 마을 전체를 아늑하게 한다. 426세대 96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다. 좁은 농로가 오밀조밀하게 밭과 밭 사이를 지나다닌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경관적 가치가 참으로 소중해 보이는 것은 하천리가 아직도 새소리 가득한 시골마을의 강점을 느끼게 한다. 차가 한 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농로가 대부분이어서 가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주민이 농로 끝자락에 집을 짓고 살면서 차를 몰고 가다가 앞에 가는 동네 어르신의 경운기를 향해 경적을 울리며 짜증을 내는 장면을 종종 목격하게 될 때, 하천리가 처한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고 한다. 비단 하천리에 국한 된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송영철 이장

송영철(51) 이장이 설명하는 하천리의 당면 과제는 "30년 전에 마을공동체가 마련한 장례식장 건물이 달산봉 서쪽에 있습니다. 너무 비좁고 낡아서 새롭게 지어서 마을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이 핵심적인 주민 숙원사업이 너무 더디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행정에서 주민 복지 차원으로 신속하게 풀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경관 등급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벽에 막혀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행정 당국의 전향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강덕철(43) 청년회장은 "하천리 해변이 가지고 있는 강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해안도로 인근에 마을회가 보유한 주차장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외부에서 탐방객들을 맞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청년 일자리가 많아져서 하천리에 아이들이 많이 뛰놀 수 있으니까요." 외부 인구 유입은 주로 노년층이 들어오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밖으로 나가버리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절박한 소망이었다.

마을공동체가 30년전에 지어서 사용해온 장례식장.

김진옥(51) 부녀회장은 신공항이 건설된다는 소식에 거는 기대가 컸다. "준비해야합니다. 대규모 사업이 아니라 우리 마을의 경관과 마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공항으로 발생되는 숙박 수요를 농어촌 마을 분위기 속에 흡수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겠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가 삭막한 도시화는 막아야 합니다. 신공항의 여파로 개발 바람이 불어도 우리 마을은 유일한 농어촌 전원마을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임애화(46) 부녀회 부회장은 "신재생에너지 마을로 변모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물질문명과 도시적인 요소가 들어와 편해진 것은 있지만 잃은 것이 많습니다. 불편해도 건강한 삶을 우리 아이들이 살았으면 합니다."

도지정 민속자료 32-46 송종선 가옥.

조상 대대로 향약에 의해 마을공동체가 유지 발전된 전통을 고수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공감대는 이것이다. 행정적으로 하천리에 살고 있으면 주민등록에 기록이 된다. 하지만 하천리민이 되기 위해서는 향약에 의존해야 한다. 마을공동체가 부여하는 의무를 다하는 사람. 그 가치가 발생시키는 에너지는 사람답게 이웃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마을 전체가 한 가족처럼 우애를 나누며 살아온 전통적 에너지는 결코 고갈되거나 단절 되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형 이기주의가 들어와 마을공동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천미리 시절에 왜구들의 침략은 창검으로 막아냈지만 지금은 밀려오는 저 자본의 힘을 막아내기 위해 심정적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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