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팟캐스트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66) 제주시 조천읍 대흘1리
주민들 믿음과 신뢰로 똘똘…‘범죄없는 마을’로 유명세
편집부 기자 sjpyo@ihalla.com
입력 : 2015. 11.24. 00:00:00

새미오름 아래 목장지대 풍경(위)과 밭담을 사이에 두고 목초가 솟아나 늦가을을 무색하게 하는 밭의 모습(아래).

약 300년전 설촌… 오묘한 지세 가진 전형적 농촌마을
도로 환경 개선되면서 관광분야 중심 사업체 속속 입주
분교 전환위기 대흘초 살린 주민 노력 전국 모범사례로
주민들 "소득창출 위해 지역농산물 판매촉진 사업 구상"



새미오름 중턱에서 바라보면 오묘한 지세를 가졌다. 중산간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다른 느낌을 준다. 바닷가 마을에서 보면 높은 지대에 있지만 교래리 지역에서 보면 해안을 낀 마을과 이어주는 완만한 경사를 보여주는 형세다. 길게 뻗어 내려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원래 이름은 '한흘'. 옛날에는 수풀이 울창한 지역이었는데 산돼지들이 오랜 세월 흙을 파다보니 수풀은 없어지고 지금 마을 안에 큰 연못이 만들어져서 크다는 의미의 '한' 뒤에 펄, 연못, 등의 의미를 가진 우리말 '흘'이 붙어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 대흘은 일제강점기 한자표기로 바뀌면서 고착된 이름. 조상 대대로 목축을 중심 생업으로 살아온 마을이라고 한다. 그랬을 것이다. 마소를 키우기 용이한 지역적 특성이 자리 잡고 있으니. 와흘과 와산이 동서로 자리잡고 조천과 함덕까지는 걸어서 한참을 가야 한다. 강인홍(81) 노인회장이 설명하는 마을의 역사는 이렇다. "전해지는 바로는 선흘과 비슷한 시기에 설촌된 마을이라고 합니다만 비석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1730년 쯤에 유제룡이라고 하는 현신교사 훈련원검정 벼슬을 지냈던 무관에 의해서 설촌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90세까지 장수 하셨던 기골이 장대한 분이셨다고 하지요." 대대로 축산을 중심으로 살아온 분들이어서 강인하고 진취적이라고 한다.

콩값 대폭 하락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가득한 콩 건조 작업현장.

4·3 이전까지 200호가 넘는 거대한 마을이었지만 소개령을 전후하여 70명 넘는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강인홍 노인회장의 증언은 "제가 어릴 때지만 똑똑하게 기억하는 것은 일본군들이 파놓은 작은 동굴 같은 곳에 숨어서 살았어요. 많은 주민들이 바닷가 마을로 흩어져서 살다가 다시 돌아와 재건하였지만 불타기 이전 마을의 규모는 되찾지 못했답니다." 지금은 중산간도로와 번영로가 마을 위와 아래로 지나가지만 그 당시엔 마소를 몰고 가는 작은 소로길이 전부였을 터. 달라진 환경만큼이나 변화에 대응하는 마을공동체의 몸부림이 치열하다. 148가구에 400명에 달하는 주민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 영역 내에 들어와 있는 관광 관련 업체와 다양한 사업장들이 속속 마을의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여기에는 도로망이 큰 역할을 하고 있고. 남조로와 번영로가 교차하는 마을이라는 장점은 대흘1리의 미래를 더욱 밝게 한다. 새미오름을 중심으로 반경 3㎞ 안에 관광지들이 10여 곳 넘는다. 주민들이 이러한 강점을 살리기 위해 농산물 직판장을 겸비한 다목적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지원 사업은 '찔끔'수준이어서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몇년 전, 마을 안에 있는 농협 소유 부지를 주민들이 힘을 모아 사들여서 거기에 당차게 어떠한 시설이라고 하려고 했지만 지원 예산은 고작 4800만원. 개발위원회를 개최해 돌려줘버리는 서글픈 일이 최근에 있었다고 했다.

강명조 이장.

강명조(60) 이장은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서 어떤 사업을 하고자 할 때 자발성에 입각한 사업 타당성을 중점적으로 고려하여 투자형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마을 단위 발전은 백년하청일 것입니다." 모든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 예산이 있지만 대흘1리가 주장하는 예산은 풍부한 농업생산물을 어떻게 '부가가치 높은 판매상품으로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지역적 여건을 행정적 판단의 우선순위에 둘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변화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체감에 가깝다. 마을 이곳저곳에 들어서는 숙박시설들이며 다양한 사업장들이 결국은 더 늘어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들을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판매 할 수 있는 여건을 갖게 되는 것이 지역주민들의 일자리 마련에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이유다. 이유가 분명한 꿈을 향하여 대흘1리 주민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작지만 마을 소유 부지에 농산물 직판장을 만들겠다는 꿈, 저력이 있는 꿈이다. 10여년 전, 학생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어서 분교로 전환될 위기에 처했을 때, 마을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대응한 결과 당시 1층이던 대흘초등학교 건물이 지금은 2층으로 바뀔 정도로 발전하였다. 모범적 사례를 구축해낸 자부심이 있다.

작은학교 살리기의 전국적 모델이 된 대흘초등학교.

아름다운 청년정신이 있었다. 송승현(42) 청년회장이 꿈꾸는 대흘1리의 미래는 초등학교 학생들과 연동되어 있었다. "마을공동체가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조상들의 생업이었던 목장 부지를 사들일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마다 송아지 한 마리를 장학금으로 줘서 그 소가 자라고 번식하면 모두가 대학 학자금이 되게 하는 마을을 만들고 싶습니다." 마을 목장을 곧 장학사업이 되게 하겠다는 생각은 농촌청년다운 발상이면서도 초등학교가 가지고 있는 주민 융합의 기능을 통하여 공동체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의지인 것이다.

주민들의 큰 자부심인 '범죄없는 마을'.

한동선(47) 개발위원이 77세가 되는 2045년. 대흘1리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다. "청년회원이 999명이 될 것입니다. 그 정도면 인구가 얼마나 늘어나 있을 것인지는 상상이 될 것이고. 마을 중심 도로는 왕복 4차선으로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행간의 의미가 있다. 지금 인구 형태로 불가능한 청년회원 수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많은 주민들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틀을 짜는 형태의 마을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대흘1리의 힘은 도로 여건에서 나올 것이라는 사실에 주민들 대부분은 공감하고 있었다. 제주시 동부지역 중산간 마을 중에 사통팔달의 분기점으로 자리잡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역에 들어와 있는 관광관련 업체들이 마을공동체와 연계하여 상생방안들을 찾게 된다면 대흘1리 주민들과 함께 더 큰 성공신화를 만들어 갈 수 있음에도 자기 울타리만 치기 바쁜 현실에 개탄하고 있었다. 대흘1리는 가장 큰 자산은 도로였다. 주민결속력 으뜸마을 저력이 그 길의 출발점에 서있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