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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55)제주시 한경면 판포리
거친바다가 오름 들판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양반마을
입력 : 2015. 09.01. 00:00:00

널개오름 중턱에서 보이는 밭들과 마을 전경(위). 포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해안가(아래).

풍수지리적으로 ‘배’ 형상… 토질 좋아 큰 마을 형성
외형상 발전 더디지만 주민 공동체의식은 크게 성장
널개오름 관광자원화 꿈꿔… 농어업 소득사업 구상



한경면의 가장 동쪽 마을 한림읍 월령리와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 조수리, 저지리가 있다. 옛 이름은 '너른개' 또는 '널개'라고 불렀다. 세종실록(1439년)에 도안무사 한승순의 보고에 '동쪽 김녕에서 판포에 이르는 10곳에 봉화와 후망을 정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설촌은 그 이전에 이뤄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조선 초기에 '판을포'라 불리어 오다가 조선조 말기에 판포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널개오름을 가운데 두고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참으로 아름다운 공간적 풍요를 만들어내면서 안정감을 찾으려는 지세를 가졌다. 조상들이 풍수지리 차원에서 '배의 모습'이라 바라본 것은 설득력이 있다. 상동 지역이 이물이고 가마귀동산을 고물 삼아 미밋에 뱃대를 꽂았다는 이야기. 남동쪽 머루왓과 오름 동쪽을 돌아 한이왓 부근까지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것은 방풍 역할을 하는 널개오름 덕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묘한 기운이 감돈다. 바다와 오름, 들판과 동산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 마을. 토양은 자갈과 바위가 섞여있는 미사질양토가 주류를 이룬다. 동네 어르신들의 토질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한림읍 수원리 다음 좋은 땅이다. 조와 보리밥이 푸들푸들 맛이 으뜸이었지.' 토질이 좋아서일까 조선시대 마을 인근에는 관아에서 관리하는 판지과원(板旨果園)이 있었다. 대대로 비옥한 토양에서 농사를 지어왔지만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생활용수의 대부분을 봉천수에 의존해왔다. 그럼에도 7개의 자연취락이 형성된 것은 반농반어의 장점과 비옥한 토양에서 소출이 좋았기 때문. 바닷바람 강하기로 유명해서 감태 등 해초가 많이 밀려와 이를 거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연의 혜택도 한 몫을 했다. 일제강점기 1930년 발행된 제주도편람에 판포리는 262호에 인구 1249명으로 되어있다. 면적에 비해 엄청나게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긍지 높은 양반들이 산다는 자부심에 따라 위세가 높던 때에는 명월면에 견주어 판포면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판포리는 그러한 마을 자부심을 이어가고 있으며 출향인사들은 각계에 진출하여 판포리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다.

아래는 크고 위로 갈수록 작은돌로 쌓아 바람에 강한 제주돌담의 전형이 남아 있다.

판포리 바다는 거칠다. 해변의 모습이 그러하거니와 북서풍이 매몰차게 부는 겨울바다는 용맹스런 장수의 고함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해거름 전망대에 오르면 제주 선인들의 마음을 닮은 이 속담이 떠오른다. "하늘 울엉 비 갠 날 시멍 보롬 불엉 절 갠 날 싯느냐."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통하여 극복의지를 나타냈던 포구의 심정. 맑은날 황홀하게 지는 해를 바라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결국 판포사람들의 진가는 모진 비바람과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는 의지, 기백에서 발견하게 된다. 비바람 칠 때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이유는 단 하나 '고기가 많이 잡히니까.' 판포리의 역사와 묘한 고리를 형성한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겨울바다는 판포 엄수개 부근이다.

고종범 이장

고종범(50) 이장이 밝히는 판포리의 과제는 대대로 내려온 농업용수 문제였다. "이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된 것도 농업용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가뭄에 고통 받는 상황을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행정기관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어도 3년전 상황이나 지금이나 감감 무소식은 그대로입니다." 가뭄에 농작물이 타들어갈 때 비상조치를 취한다고 난리법석을 떨다가 항구적인 해결책을 호소하면 예산타령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지겹게 봐왔다는 주장. 저류지와 같은 토목시설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저수지도 만들 예산 여건이 된다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는 모습이었다. 좋은 토질에 농업용수 문제만 해결되면 마을공동체가 발전을 위한 로드맵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김형철(42) 청년회장이 꿈꾸는 판포리의 미래는 "오직 농어업 소득증대사업에 있습니다. 가공과 유통의 단계까지 마을공동체 차원에서 기업마인드를 가지고 대응 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 할 수 있도록 처음에는 강력한 행정지원이 요구됩니다." 단순 부농을 꿈꾸던 아버지 세대가 아니라 농업경영인의 모습으로 고향 발전을 견인하겠다는 아들 세대의 당찬 포부가 아름답다.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어디에서 봐도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널개오름.

고임연(49) 부녀회장은 "마을 어르신들의 자녀분들이 외지에 나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을회가 운영하는 어르신들의 공동생활공간 마련이 시급합니다." 판포며느리의 효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덧붙여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여가생활 여건에 대한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 농촌 현실이 반영 될 수 있는 시설과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주장이다. 변재성(50) 개발위원장의 꿈은 널개오름을 관광자원화 하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굴이라도 뚫어서 자원화 하는 방향을 찾고 싶다는 독특한 생각은 마을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도전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그것.

자연친화적인 조형물 느낌을 주는 농업용수 시설.

이승길(78) 노인회장이 108세가 되는 2045년의 판포리를 그려달라고 했다. 인구가 5000명으로 늘어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외지에서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의 숫자를 계산해보면 그 정도는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다분히 판포리의 옛 영광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눈빛으로 차분하게 준비해야 할 것을 설파하시는 어르신의 표정에서 짙은 애향심을 발견했다. 활로는 조상들의 공동체의식을 능가하는 마을 단위 결속력 마련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판포리라는 행정단위가 1차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단위로 인식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공감대. 외형적으로는 30년 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마을. 의식의 성장 속도는 엄청난 변화를 이뤄냈다고 자부하는 마을이다. 지킬 것은 지켜내며 더 큰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줄달음질치는 판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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