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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46)제주시 화북동
만남과 이별,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품은 제주섬의 관문
입력 : 2015. 06.30. 00:00:00

곤을마을에서 바라본 해안절경(위)과 화북진성터에 있는 청소년문화의집 옥상에서 내려다 본 마을전경(아래).

약 900년전 설촌… 조선시대 전략적·경제적 요충지
비석거리·환해장성·원담 등 역사·문화적 가치 풍부
여인들 스토리텔링의 보고… 배비장전 배경이 된 곳
주민들 "화북공업단지 이설… 관광호텔 들어섰으면"



별도봉 정상에 올라 바라보면 남동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바닷가까지 유서 깊은 마을이라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많다. 조선시대 제주의 관문 역할을 했던 화북포가 있어서 그렇다. 만남과 이별은 세상사 드라마틱한 대목을 보여주는 마디마디이니 그럴 법도 하고. 이 섬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곳이니 안전과 보호 및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이 있어야 했다. 1678년 화북진성이 구축된다. 화북포에 도착한 숱한 배비장들의 눈에 비쳤을 모습은 크게 세 개의 정자가 보였을 것이다. 배가 출항 할 수 있을 지 바람을 기다리던 객사 환풍정(喚風亭), 북성 위에서 바다를 감시하던 망루인 망양정(望洋亭), 포구 안에서 출입관리 업무를 담당하던 영송정(迎送亭). 환풍정에 올라 사방을 살피니 망월루에서 한 쌍의 남녀가 이별을 슬퍼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에서부터 배비장전은 시작된다. 배비장전의 배경이 되는 마을 화북동. 바람이라도 좋아 배들이 많이 들어오는 날엔 시끌벅적 했을 것이다. 탐라순력도 화북성조(禾北城操)에 나타난 화북포와 진성의 밀접한 관계를 보더라도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서마을 바닷가에 보전상태가 양호한 원담.

동네 어르신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알짜배기 마을의 출발은 속칭 '부루기' 부록마을에 약 900년 전 절샘(맑은샘터)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고 사찰이 생긴 뒤로 더욱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차츰 거로 지역으로 확대되더니 고려 충렬왕 시절 제주의 10현을 설치할 때 별도현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최소 600년 전후로 바닷가 마을에 까지 그 영역이 넓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화북동 지역 경계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는 것. 현재 화북동은 2개의 법정동(화북1동, 화북2동)과 6개의 자연마을(동마을, 중마을, 서마을, 거로, 황사평, 동화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1998년 주공아파트 4개 단지와 아파트 남쪽에 동화마을이 자리 잡으면서 인구가 2만명이 넘는 거대한 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제주항 방파제가 뻗어 나와 화북포구 앞까지 감싸게 되면서 조선시대를 통틀어 섬 제주의 관문이었던 옛 영광을 다시 찾으려는 기세다.

별도포에서 제주성 가는 길에 관리들이 자신의 존재를 남긴 비석거리.

4·3때 잃어버린 곤을마을을 품고 있는 별도봉 해안절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주공아파트 인근 삼사석까지 역사의 흔적이 박혀있는 마을이다. 제주목사와 같은 관리들이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는 비석들을 세워서 화북포로 드나드는 이들이 알아주기를 바랐던 비석거리. 화북진성 성담과 환해장성, 원형이 그나마 잘 보전된 서마을 바닷가 원담과 해신사. 바다에 운명을 건 사람들이 바다신에게 빌어서 무사하기를 바랐던 그 염원이 깃든 곳이다. 지금도 마을제 형식으로 해신사(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2호)에서 제를 올린다. 해신제와 관련하여 안애생(64) 주민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의 따끔한 질책이 있었다. "산신제는 관청에서 크게 하고 해신제는 왜 마을에서 작게 하느냐? 바다신이 산신만 못하냐?"

부찬식 연합마을회장

조선 중기 호방한 문인 임제(林悌)가 제주를 여행하며 쓴 남명소승(南溟小乘)이라는 기행문에 화북포를 배경으로 참으로 로맨틱한 시를 남겼다. <삼월이라 삼짇날/복사꽃 활짝 피어/돛단배들 두둥실 바다를 건너오면/곱게 단장하고 별도포에 나가/해지는 언덕 위를 노닐다가 팔짱 끼고 돌아온다네.> 전라도 지역에서 수군들이 변방을 지키기 위해 들어오는 날, 연인을 기다렸던 비바리들은 노래했다. 그 배로 다시 임무를 마치고 떠나는 연인을 눈물로 마중하던 곳. 구전에 의하면 그 날은 여인들의 환희와 통곡이 빼곡하게 교차하던 포구였다고 한다. 스토리텔링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 두께가 쌓여 배비장전을 낳은 것이기도 하고.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관광자원이 꿈틀거린다. 정주 여건 개선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마을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찾아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부찬식(66) 연합마을회장은 "가장 큰 마을 과제는 화북공업지역 이설 문제입니다. 역대 도지사들이 선거 때만 되면 검토하겠다고 하다가 당선되면 감감 무소식." 마을 발전이 어떤 형태로 흘러가야 하는 지 각성하게 된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 정주 여건은 김성구 동장의 가치관 속에 녹아 있었다. "역사와 문화는 여유로움을 일궈내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 도시화가 추구해야 할 궁극 목표가 화북동에서는 어떤 접점을 찾아야 할 것인지 고민이 깊었다.

지금도 정월이면 해신제를 올리는 해신사.

새로 지어질 화북동 주민센터에 거는 기대가 컸다. 자생단체들의 활동공간을 넓혀서 주민 자발성을 증대시키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면서 화북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동 단위에서 동네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유일한 마을이라는 것이다. 김영환(50) 대표를 중심으로 '화북윈드앙상블'이 활발하게 공연 준비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 여름에 화북진성에서 마을주민들을 모셔서 문화마을 화북동의 꿈을 보여줄 것입니다." 마을 공동체의 리더들이 유독 문화예술을 강조하는 심정을 차츰 알 것 같았다. 조상 대대로 화북동에 살아온 사람들과 이주해 온 주민들이 화북이라는 울타리에서 공동체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이라는 공감의 장보다 효과적인 만남의 방식이 없기 때문. 이상헌(44) 청년회장이 77세가 되는 30년 뒤, 화북동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다. "마을 공동체에서 지은 아파트형 임대주택이 많아서 자녀들이 화북을 뜨지 않고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구동성으로 꿈꾸는 모습이 있었다. 화북공업단지가 이사 가고 그 곳에 마을에서 운영하는 대규모 관광호텔이 들어섰으면 좋겠다. 꿈을 포기하면 현실이 되지 못한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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