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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42)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
천미천이 흐르고 오름이 둘러싼 오백년 정의현 중심지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입력 : 2015. 06.02. 00:00:00

영주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성읍리 전경(위)과 정의현의 중심지였던 읍성(아래).

생활환경 좋은 평탄대지에 형성…주민들 ‘중심지는 성읍’ 자부심
1984년 마을전체 민속자료 지정 마을개발 차단… 역기능도 발생
지역민 "30여년 졸속행정" 분통…민속마을 특수성에 ‘삶’은 실종
마을발전 아이디어 발굴 골몰…인근에 ‘관광타운’ 건설 희망



1416년, 제주도는 3읍 구조로 새롭게 편제됐다. 시흥에서 법환까지 이르는 제주섬 남동부가 정의현의 영역. 성산읍 고성리에 있던 읍성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정의현 관할지역을 아우르기에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의현이 관할하는 국마장인 9소장 지대가 고성리 정의읍성과는 거리가 멀어 목마장을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 새로운 읍성 후보지 중에 당시 마을 이름인 진사리(眞舍里·晉舍里)로 옮겨서 성을 쌓았다. 1423년, 세종 때 일이다. 해안가에서 8km 떨어진 비교적 중산간 지대에 읍성을 설치한 이유는 주변에 수량이 풍부한 천미천이 자리하고 있고, 영주산을 위시한 오름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평탄대지가 형성되어 있어 생활환경에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

오백년 세월 정의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형화 된 성읍1리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할머니들의 대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령천년, 그 모습 자체로 성읍리의 역사인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161호).

표선에 장이 서는 날 "촌에 장 보러 가자!"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 상권이 발달한 곳이라 하더라도 성읍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촌이다. 중심은 성읍이라는 생각이 뼈 속 가득 흐르는 마을. 중산간 지대 도로망이 발달하면서 성읍리는 새로운 형태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주변 마을 어르신들이 차를 몰고 성읍에 와서 주차하고서 버스를 타고 제주시에 가서 일을 보고 돌아와 다시 차를 타고 자신의 마을로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제주섬 동남권의 중요 거점으로 자리매김 되는 과정을 다시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84년 성읍1리는 놀라운 변화와 마주하게 된다. 한 세대 30년 전의 일이다.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 188호'로 마을 전체가 지정된 것이다. 읍성이 있었던 마을이면서 전통적인 초가와 마을 취락구조가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 '옛 것을 어떻게 보존 할 것이냐' 하는 문화재청 시각의 지배를 받게된 것이다. 관광객 유입이라는 경제적 기대와 함께 출발한 성읍리 모습은 순기능 못지않게 적지 않은 역기능을 발생시켰다고 한다.

강희팔 이장

조상 대대로 정겹게 살아온 마을 사람들이 관광이라는 산업구조에 노출되면서 마주하게 된 현실을 '가옥 내 주민편의시설 설치기준'이라는 자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건물 외부로 시멘트, 금속, 플라스틱 등 현대적인 재료가 노출되어서는 안된다. 생활의 필요에 의해 불가피하게 건물의 신축이 필요한 경우 전통가옥의 배치수법에 따라 위치를 선정하고, 신축 건물의 높이와 규모는 당해 가옥 내 기존 건물의 규모를 과도하게 초과해서는 안되며, 전체적인 형태는 기존의 가옥과 어울려야 한다. 민속마을이라는 명칭 밑에 주민들의 행복추구권이 결박당하고 있는 것이다. 주민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향을 떠나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환경을 제공한 중요민속자료 지정 30년.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는가? 강희팔(55) 이장은 단호하게 밝힌다. "잃은 것이 대부분이다." 원인은 문화재지역으로 묶은 규모에 있었다. 읍성 내부가 2만 5000평 정도인데 그 열 배에 달하는 면적을 묶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울분을 토하는 모습의 이면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살고 싶은 출향인사들에게 생활터전을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괴로운 심정이 녹아있었다.

민속마을 유지관리를 맡고 있는 행정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은 극해 달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30년 동안 일관헌을 세 번이나 부수고 다시 짓고 했다는 것. 다른 경우는 오죽 하겠냐는 것이다. 졸속행정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박한 제주인의 마음을 닮은 정의현 돌하르방.

찔끔 예산을 편성하여 학술조사를 하고 문화재청 시각으로 집행하다 보니 전체적인 윤곽을 가진 그림은 그릴 수 없었던 세월이라고 그 동안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민속마을이 갖고 있는 특수성은 시설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민의 삶과 어떻게 아름다운 교집합을 형성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또 무형의 정신자산에 대한 투자 없이 옛 것의 가치에만 몰두하였다는 지적이다. 갑갑한 현실을 뚫고 강희팔 이장이 꿈꾸는 미래의 성읍1리는 읍성의 고유한 이미지에 위해를 가하지 않을 거리를 두고 관광타운을 건설해서 주민들이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학생 수가 급격하게 줄고 있는 초등학교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불안감을 문화재 행정이 풀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현감이 공식업무를 보던 일관헌.

초등교원 시절에 성읍리에 시집와서 40년을 살아온 송심자(65) 선생님은 성읍리의 명암을 누구보다 극명하게 목격하고 아픔을 함께한 분이라고 한다. 95세가 되는 30년 뒤에 성읍1리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다. 대답은 의외였다. "지금의 행정논리대로 라면 100년이 지나도 바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문화재 지정 지역을 대폭 축소하고 읍성 내부에 획기적인 투자를 해서 관람과 체험만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총사업비가 100억이라면 10년 간 10억 씩 투입해서 만들려는 발상은 헛수고라는 것이다. 시간적 선택과 시간적 집중이 성읍민속마을에 해당되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주장이었다. 한 세대 동안 행정이 성읍민속마을을 어떻게 다뤘는지 너무도 많이 경험했기에 절규에 가까운 질책이 터져 나왔다.

정의현의 중심지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 날 관광지로 변모한 마을에서 숱한 이질적인 요소와 충돌하며 심적 마모를 거듭하며 살아온 30년이다. 순박한 얼굴을 한 성읍리 돌하르방의 표정이 필자의 눈엔 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국가가 민속자료로 지정해놓고 주민피해에 대해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는 현장이 성읍1리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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