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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30)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입력 : 2015. 03.03. 00:00:00

마을회관에서 바라 본 남쪽 전경(위)과 본향당 전경(아래).

한라산 정기가 흐르는 지맥에 편안히 누운 사람을 품은 마을
눌흘-논흘-노늘 등 옛 정취 풍기는 마을이름 다양
350년전 김해김씨 김만희 家의 9대손이 처음 정착
1948년 제주4·3때 마을 전체 불에 타는 아픔 겪어
500년 산 팽나무 있는 본향당… 정신적 공동체 형성



지명 유래가 독특한 마을이다. 와흘은 한라산의 정기를 받은 지맥 모양이 완만하고 천천히 바다로 흘러내리고 있어 그 지형 모습이 편안하게 사람이 누운 형상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눌 臥자와 산 높을 屹자를 써서 와흘리라 했다.

옛날에는 눌흘이라고 불렀으나 세월이 흐르다보니 눌흘이 논흘로 발음이 바뀌어 부르게 되고, 노늘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18년 이후 한문 표기로 와흘리로 부르게 됐다. 나지막한 구그네 오름에 올라서 바라보면 편안하게 누운 듯 주변이 아늑하다.

구그네오름 남쪽 목장지대.

양남규(78) 노인회장이 설명하는 설촌유래. 고려 충정왕 때 정승을 지냈다는 김해김씨 김만희가 이씨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뜻을 굽히지 않아 제주로 귀양 오게 됐다. 그 분의 9대 손이 지금부터 350년 전 이 곳 와흘리 팽나무 있는 곳에 이르러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고 정착하게 된 것이 설촌이 배경이다. 마을 지명 중에 '불칸터'라는 곳에 먼저 살다가 큰 불로 인하여 온 마을이 폐동됐다. 그래서 지금의 넓은 못 지역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마을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 1948년 4·3으로 마을 전체가 불탔다가 1954년 재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본동, 상동, 고평동, 초평동, 전원동으로 구분대는 5개의 자연마을이 모여 와흘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하나의 관념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있다. 500년 세월을 살아온 팽나무가 있는 본향당이 있는 곳. 와흘리는 먼저 이 정신적 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름답게 정비된 마을안 넓은 못.

조상 대대로 마을 결속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온 곳이라고 한다. 주민들의 생산, 물고, 호적, 장적을 관장하고 있다는 믿음은 절대적인 권위에 가까웠으리라. 이 당은 '와흘한거리 하로산당' 또는 '노늘당'이라고 한다. 당에 좌정한 신은 송당 소로소천국의 열 한 번째 아들인 산신또로 사냥을 하는 산신이기 때문에 당굿을 할 때 산신놀이를 한다.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9-3호로 지정돼 있다. 자연마을 5 곳의 주민들이 음력 1월 14일 마을 본향당신에게 세배를 올리는 '신과세제'를 지내는 것은 와흘리의 독특한 문화이며 정체성이다. 이런 공통분모를 가진다는 것은 지역역량 강화에 있어 근본적으로 중요한 토양. 이러한 마을주민들의 공공체의식을 기반으로 마을 발전전략도 마련되고 있었다. 마을 발전 슬로건에도 녹아 있다. "신이 품은 메밀구름 들판마을 와흘리" 발전 목표도 天地人思想을 차용하여 구체화 했다. '하늘을 품은 마을' '땅을 품은 마을' '사람을 품은 마을' 이 셋은 와흘리 주민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이자 달성 과제다. 어떠한 마을만들기 사업을 펼치더라도 여기에 그 내용을 대입해 방향이 타당한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다. 모방과 답습을 벤치마킹이라는 용어로 포장해 경쟁력을 상실시키는 근자의 모습에서 와흘리만의 '그 무엇'을 추구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진다.

천창석 이장

천창석(53) 이장은 '중산간 지역에 10만 여 평 넘는 먼나머루 지역에 메밀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체험관광지를 마을공동체 사업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땅을 품은 마을 와흘리의 비전. 1192ha에 889명의 주민이 합심해 이루고자 하는 꿈이 외부 자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해나가자'는 의지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철두철미하게 내생적 개발을 위한 학습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확보하면서.

뚝심 있는 주민들이다. 미소가 번지는 입증 근거가 있다. 50년 가까이 이 마을에서는 술을 사거나 팔 수 없다. 60년 대 말까지 와흘리에 시집 온 며느리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남자들끼리 모이면 술판이 끊어지지 않아서 속이 썩었다고 한다. 당시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마을의 총의를 모아 마을 자체에서 술을 팔수 없도록 하는 법(?)을 만들고 강력하게 단속활동을 펼친 결과 음주에 의한 다툼이나 남편들의 농삿일 파업 또는 태업이 많은 부분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의 알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그러한 마을 결속력이 강제하지 않았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미용 봉사하는 날, 마을사람들이 함께 점심식사하는 모습.

김송옥(77) 개발위원장은 "마을공동체의 힘이 각 가정과 개인의 운명을 바꾼 건강한 사례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관청이나 외부에 의존하는 발전 방향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문제점을 찾고 그 문제 해결을 통하여 더 나은 미래를 열고자 하는 것. 이런 정신무장이면 어떤 마을 발전 사업도 가능하다. 희망은 내부에 있으니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조천읍 관내에서 유일하게 이 곳 와흘리만 오폐수처리시설이 없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차별이 현재 행정에서 가능한 일인가?

이정금(51) 부녀회장이 81세 할머니가 되는 30년 뒤, 와흘리의 미래상을 그려달라고 했다. "가장 큰 걱정은 자식들이 우리 부부 걱정을 할까봐 그게 걱정이다. 자식들이 부모 걱정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게 제주도에서 제일 좋은 노인복지시설이 와흘리 주민들을 위해서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마을 발전 전략이라는 것이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갈이었다. 세대 간 지니고 있는 입장들에 대한 반영이며 주민 스스로에게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분투요 각고인 것이다. 조천읍과 통합 전 제주시가 가장 가까운 중산간 마을. 시간적으로 회천을 통해 도시생활권과 빠르게 닿을 수 있다. 접근성이 지닌 강점을 마을 발전에 중심 전략으로 삼고 있었다. 농촌이 가진 환경적 요소를 잃지 않아야 강점을 유지 할 수 있다는 것도 주민들의 신념에 흐르고 있고. 와흘리는 지형적 분위기가 지닌 편안함을 힐링 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한창이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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