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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
[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16)/제4부-옛길을 탐하다](2)과거의 길, 현재의 길(상)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입력 : 2014. 07.30. 00:00:00

제주성안의 중심도로였던 알한짓골. 한짓골은 이른바 남문한질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제5부-제주성의 미래는?

도심을 실핏줄처럼 연결하는 옛길은 아무렇게나 생겨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부터 도로, 즉 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법적으로 세세하게 규정해놓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이었던 경국대전에 도로제도와 관련된 규정이 있다. 조선 초기부터 도로제도 정비를 통해 통치의 효율성 등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도성 등의 도로는 대·중·소로에 따라 일정 규격을 충족해야 했다. 법에 따라 도성내의 대로는 56척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영조척(營造尺)으로 환산하면 약 17.5m 정도 된다. 영조척은 목수가 쓰던 자로 목공척(木工尺)이라고도 한다. 부피측정이나 건축, 성곽 축조를 비롯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사용됐다. 영조척 1자의 길이는 30.65cm 정도이다. 조선시대 도성의 대로는 오늘날로 따지면 왕복 3차선 도로 정도에 해당되는 것이다.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으로 노폭을 규정하고 있다. 영조척으로 환산할 경우 중로는 5m, 소로는 약 3.43m의 넓이다. 도로의 양편으로는 2척의 도랑을 두도록 했다. 약 1.25m 너비다.

 이는 어디까지나 도성의 길에 관한 것이다. 지방의 도로 역시 중요도에 따라 대·중·소로 구분했지만 너비는 지형조건 등에 따라 다르다.

 제주목이 자리한 제주성의 경우 도로의 규모 등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전국 읍성의 예를 어느 정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건물배치 등 기본 구조는 다른 지방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서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에 도로관련 규정
도로제도 정비 통해 효율성 등 추구

제주성엔 사람들이 오가는 길뿐만
아니라 화재로 인한 불길 막아주는
동불막골·서불막골 등 옛길도 있어


이름에서도 지역성·정체성 묻어나



제주성안의 중심도로였던 알한짓골. 한짓골은 이른바 남문한질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사진 왼쪽) 좁은 골목길로 이어진 남문샛길과 고층아파트. 강희만기자

도심을 실핏줄처럼 연결하는 옛길은 아무렇게나 생겨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부터 도로, 즉 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법적으로 세세하게 규정해놓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이었던 경국대전에 도로제도와 관련된 규정이 있다. 조선 초기부터 도로제도 정비를 통해 통치의 효율성 등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도성 등의 도로는 대·중·소로에 따라 일정 규격을 충족해야 했다. 법에 따라 도성내의 대로는 56척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영조척(營造尺)으로 환산하면 약 17.5m 정도 된다. 영조척은 목수가 쓰던 자로 목공척(木工尺)이라고도 한다. 부피측정이나 건축, 성곽 축조를 비롯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사용됐다. 영조척 1자의 길이는 30.65cm 정도이다. 조선시대 도성의 대로는 오늘날로 따지면 왕복 3차선 도로 정도에 해당되는 것이다.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으로 노폭을 규정하고 있다. 영조척으로 환산할 경우 중로는 5m, 소로는 약 3.43m의 넓이다. 도로의 양편으로는 2척의 도랑을 두도록 했다. 약 1.25m 너비다.

이는 어디까지나 도성의 길에 관한 것이다. 지방의 도로 역시 중요도에 따라 대·중·소로 구분했지만 너비는 지형조건 등에 따라 다르다.

제주목이 자리한 제주성의 경우 도로의 규모 등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전국 읍성의 예를 어느 정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건물배치 등 기본 구조는 다른 지방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서도 알 수 있다.

제주성은 남문에서 오늘날 제주북초등학교 일대에 위치했던 제주목 객사까지 이어진 길이 대로, 즉 큰길이었다.

18세기 초중반 제주성 내의 상황을 잘 나타내고있는 제주목도성지도를 보면 남문에서부터 옹기종기 모여 앉은 초가 사이로 길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길은 이른바 남문으로 오가는 큰길이라고 해서 '남문한질'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한짓골이 생겨났다. 한짓골은 다시 제주중앙성당 위쪽을 웃한짓골, 아래쪽을 알한짓골이라 구분했다.

한짓골은 제주성안의 중심도로답게 여러 갈래의 골목길로 연결된다. 한짓골에서 남문샛길과 이앗골 병목골, 동불막골, 서불막골, 세병골, 두목골 등 옛길이 군데군데 끊길 듯이 이어져 있다. 어떤 길은 번듯한 도로로 변해 옛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옛길 이름마다 사연이 있고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남문샛길은 남문으로 오가는 좁은 골목길이다. 지금도 너비 2m 남짓한 골목길이 남성로 23길~25길 일대에 수 십 미터 남아있다. 현무암 돌담이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낡고 허름한 시멘트 집들이 옹기종기 양편에 자리해있다. 사람들은 텃밭에서 채소를 다듬는가 하면 점집에서 길흉화복을 헤아리기도 한다.

골목길 너머로는 몇 년 전 생긴 고층아파트가 위압스런 모습으로 남문샛길 일대를 굽어보고 있다. 낡은 지붕과 좁은 골목길 그리고 고층아파트. 멈춰버린 근대의 풍경과 개발바람에 들썩이는 현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 가운데 하나다. 제주성과 원도심의 일그러진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앗골은 제주중앙성당에서 인천문화당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일대다. 옛 제주대학교 병원 일대에 제주판관 집무실인 이아 관청이 있었던데서 이앗골이라 했다. 원도심의 중심으로 2000년대 초까지 번성을 누리던 공간이었다.

이앗골에서 로베로호텔이 자리한 관덕로로 이어지는 길은 병목골로 불렸다. 이 일대는 최근 문화예술의 거점으로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면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제주도유형문화재인 향사당을 중심으로 해서 작은 골목길이 연결돼 있다.

길은 사람들의 오가는 목적으로만 만들어지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제주성 안에는 화재로 인한 불길을 막기 위한 옛길도 있었다. 동불막골과 서불막골이 그것이다. 불길 등 일종의 액운을 막는다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졌다. 동불막골은 제주중앙성당 북쪽 골목길이 해당된다. 서불막골은 제주성내교회 남쪽 골목길을 일컬었다. 동불막골 동쪽으로는 알한짓골을 건너 세병골로 이어져 중앙로와 연결된다. 세병골은 제주목관아의 군기고였던 세병헌(洗兵軒)이 있었던데서 유래했다.

이처럼 옛길은 단순한 도로로서의 기능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다. 그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옛길의 이름에서도 지역성과 정체성이 묻어난다. 현대화된 도심에서 그나마 제주다움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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