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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규칼럼
[강문규 칼럼]탐라선인들이 물려준 고귀한 유산
입력 : 2011. 12.06. 00:00:00
제주성은 탐라국 수부(首府)의 성곽이다. 다시 말해 탐라국 왕성(王城)이었다는 말이다. 제주성이 정확히 탐라국시대 언제 축조되기 시작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태종 11년(1411) 정월에 제주성 수축을 명하였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을 볼 때 제주성 축조 시기는 고려시대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제주성은 동·서쪽에 산지천과 병문천을, 그리고 북쪽에는 바다를 낀 형태로 세워져 있다. 이는 하천과 바다를 경계로 성을 쌓음으로써 외부의 침입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지형지세를 고려한 축조법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제주성안에 북두칠성을 모방하여 성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7개소에 단을 쌓았다는 내용의 칠성대에 관한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축조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후의 시기에 이루어졌고,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사라졌음을 뒷받침하는 관련 기록과 사진, 그림 자료들이 나타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칠성대 자료를 통해 탐라사회의 전개와 변천사를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칠성대가 일도, 이도, 삼도를 하나로 묶으면서 북두칠성 형태로 쌓아졌다는 사실은 탐라왕성이 계획도시였음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드러난 칠성대의 위치를 보면 일도에 3개소, 이도와 삼도에 각 2개소가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탐라를 지배하던 집단이 지금의 칠성로에 거처를 두었다는 점을 뜻한다. 그들은 산지천을 낀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도는 가락천을, 삼도는 병문천을 나누어 차지했는데 풍부한 식수원과 포구를 낀 일도지역이 여러 가지로 자연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제주성내에서 가장 오래된 길은 남문 한짓길에서 칠성로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칠성대가 위치해 있었는데, 이는 칠성대를 따라 도로가 개설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칠성로도 여기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조선시대에는 제주성안을 칠성대촌(七星大村)으로 불렀고, 탐라왕의 호칭인 '성주(星主)'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한라산 정상 서남쪽 '선작지왓' 일대에도 '칠성대'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록과 그림 자료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실제로 '선작지왓'에는 거대한 돌무더기가 7~8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부분에 관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매우 흥미를 끄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탐라인들은 왜 칠성대를 탐라왕성 만이 아니라 한라산에까지 칠성대를 쌓았을까. 최근 '제주기행'이라는 좋은 책을 펴낸 민속학자 주강현선생과 몇 차례 칠성대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하와이에 가면 성 위에서 별을 바라보는 하와이왕의 조각상이 있다는 것이다. 하와이도 제주처럼 한 때는 독립국이었던 역사가 있다. 그러면 제주와 하와이에 상징적으로 남아 있는 별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별을 보며 항해를 해야 했던 해양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함께 별은 자신들이 속한 지역의 농사와 어로의 흉·풍년, 심지어 나라의 흥망성쇠를 점치고 이에 대비토록 함으로써 백성과 지배층들로부터 권위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칠성대는 묻혀버린 탐라의 역사를 발굴·재조명하는 키워드다. 북두칠성은 천문분야는 물론 탐라시대의 정신사, 도시발달사, 민속신앙, 심지어 탐라인들의 조형예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구주제를 간직하고 있다. 칠성대가 상징하는 제주의 별문화는 대단히 독창적이면서도 국내는 물론 세계인들과 교류·교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다.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 집대성하려면 한, 두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관련 학계의 관심은 물론 일반인,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하다. 그들이 '제주별문화연구회'를 만들고 그 일들을 했으면 한다. 탐라선인들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보물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연경관이나 유산만이 아니다.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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