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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제주학회가 마련한 세미나에 참가한 뒤 모처럼 서울대 전경수 교수(문화인류학)와 밤늦게 제주역사문화에 관해 담소를 나누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그 분의 논문 등을 접하며 나름대로 제주학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왔었다. 그 분은 외가가 제주다. 그래서 늘 제주에 남다른 사랑과 관심을 갖고 있고 1970년대에 '제주학회'를 창립하고 육성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분의 글과 말에 제주에 관한 해박(該博)한 지식과 애정이 묻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와인 한 병을 시켜놓고 제주의 역사·문화·생태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밤 12시를 훌쩍 넘기게 되었다. 그 분과 다음날은 제주시 원도심을 산책했다. 삼성혈에서부터 최근에 세운 칠성대 일곱 표석자리, 그리고 산지천변을 둘러보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유홍준 교수가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역사문화기행의 화두가 된지 오래다. 사실 무심코 스쳐가는 곳도 현장의 내력을 알면 새롭게 보이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산지천변에 얽힌 이야기도 그렇다. 산지천을 이야기 할 때 조선시대 제주목사를 지낸 노봉 김정목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735년(영조11) 4월에 제주목사로 도임(到任), 1737년 9월까지 재임했는데 화북포구를 넓히기 위해 직접 돌을 나르며 공사를 독려하다 숨졌다. 지금도 화북포구에는 그를 기리는 공적비가 남아 있다. 김정목사는 한마디로 탁월한 행정가였다. 그가 남긴 글을 모아 펴낸 '노봉문집'을 보면 역사·문화·교육·생태에 관한 자취를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칠성대와 월대를 수축하고, 사직단과 마조단, 여단과 같은 유적들을 복원했다. 당시 제주향교에는 소위 지배층 자녀들만 입교가 허용됐는데 그는 거기에서 제외된 백성 중에서도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고자 산지천변에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세우기도 했다. 더구나 넓은 토지와 배를 서당에 주어 그곳에서 나온 곡식과 생선으로 교수와 학생들의 숙식을 해결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자취는 '반쪽 대학등록금'이 사회적 이슈로 불거지고 있는 작금의 세태에 귀감이 되고도 남을 일이다. 김정목사는 뛰어난 도시행정가이기도 했다. 270여년 전 그는 산지천변을 하나의 도시공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곳에 정자를 세우고 산지천 줄기에 샘솟는 샘마다 이름을 짓고 바위에 글을 새겼다. 또한 산지천의 지형을 풍수적으로 해석한 호반병·중반변·용린병이라는 글자를 큰 바위에 음각, 선비와 백성들이 이를 음미하며 즐기도록 했다. 며칠 전 문화도시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모처럼 서울에 갔을 때 청계천을 찾아 갔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청계천은 산지천 복원사업을 모델 삼아 추진되었다. 그 때 서울시정과 의회의원들이 산지천을 여러 차례 다녀가기도 했다. 그런데 청계천은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끄는 명물이 되었는데 어떻게 산지천은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조차 외면하게 되었는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산지천이 철저하게 통수(通水)기능을 위한 대상으로 여긴 데 비해 청계천은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화·생태공간으로 가꾸고자 했던 차이에서 비롯됐다. 산지천변은 걸어 갈 수도 물을 손에 적실 수도 없다. 그저 멀리 도로위에서나 바라 볼 수밖에 없는 반쪽 친수공간이다. 문화적 감각이 녹아나지 않는 토목사업을 겨우 2%의 부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산지천에서 보듯 처음의 작은 차이가 나중에는 큰 격차로 나타난다. 제주의 토목사업에 문화적 감각과 접근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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