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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33)돌문화의 본질
돌문화 세계관 강제 넘어 제주 민중의 자주적인 생명력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입력 : 2020. 11.02. 00:00:00

필역, 공장치르기 노동 보상
강제 노동의 애환 스며있어
지혜로운 자주적 소유 정신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우지는 못했다. 인간은 늘 그랬듯이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다.-버트란트 러셀

도덕의 본질은 선과 악의 구별이고, 미학의 본질은 미와 추의 구별이고, 경제적인 것의 본질의 이익과 손해의 구별이라면,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칼 슈미트

생산을 위해 자발적으로 쌓은 돌담인 밭담.

#역사(役事, 공공 토목사업)에서 유래한 필역과 공장치르기

제주의 의례 가운데 필역과 공장치르기라는 말이 있다. 필역(畢役)은 장례식 때 봉분이나 산담을 마치고 나면 영장밧에서 그 날 수고한 모든 사람들에게 준비한 답례품을 "폭삭 속앗다"고 하며, 물품으로 드리는 것을 말한다. 장례식이 그 만큼 힘든 일이고, 그것의 아픔을 나누어주고 고마움이 표시로 상주마다, 혹은 그 가족들의 성의를 표시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 덕분에 큰일을 잘 치렀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공장(供狀, 工匠)치르기 또한 상장례 때 염습해 준 사람, 산제(山祭;무덤을 쓸 장소에서 미리 지내는 토신제), 관을 짜거나 무덤의 구덩이를 판 개광(開壙) 목시(木手), 도감, 그리고 3년 상을 지내던 시절 대상·소상이나 결혼 잔치 등 큰일 때에 도감(都監), 밥할망(솥할망)에게 큰일을 치르느라고 고생한 공갚음으로 '상착'에 떡과 돼지고기 한 근 가량, 제주 한 병을 담아 일을 치른 집안의 대표자가 큰일 끝 시간에 그 당사자에게 드리는 예우를 말한다. 이 공장치르기가 끝나면 큰일 집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떡반'을 나누며 큰일을 함께 치른 공을 고맙게 여긴다.

이 두 가지 의식은 공동체 사회의 눈여겨 볼만한 '의례 속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필역(畢役)은 수고로운 일을 치른 후에 간단한 보답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관에서 일으킨 축성(築城)이나 능역(陵役)과 같은 역사(役事) 때에 참여한 모든 일꾼들에게 베풀었던 음식이나 쌀, 옷감 등을 나누어 주던 것과 연관이 있으며, 공장치르기 또한 그런 역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이들에게 따로 음식으로 보상했던 것에서 유래를 찾을 수가 있다.

아무튼 이 두 용어는 과거 큰역사(大役事)를 일으켰을 때의 흔적이 분명하고 공장치르기가 그것에 참여했던 장인(工匠)들에게 예우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공공 방어를 위해 쌓은 돌담 왜포연대.

#요역(요役), 국가기구의 노동력 착취 수단

조선시대 국가에 부담해야 할 세금 형태는 15·16세기에는 크게 전세(田稅, 논밭에 부과하는 세금), 역(役, 일, 군역과 요역), 공납(貢納, 지방특산물을 바치는 일) 등이어서 백성들은 무거운 노동력 징발에 고초를 겪었지만,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가 되면 부세 제도가 바뀌면서 크게 전결세(田結稅), 군역세(軍役稅), 환곡세(還穀稅), 잡역세(雜役稅) 등 4가지로 구별되면서, 노동력 징발을 줄일 수 있었던 대신에 그 만큼 현물조세를 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즉 이 시기가 이전 시기와 다른 점은 부세(賦稅)를 물품으로 바치는 물납화(物納化), 부세(賦稅)를 밭의 규모에 따라 곡물을 내는 전결세화(田結稅化)였다. 17세기의 사회적 변동은 세금은 물론 군역(軍役)까지도 변화를 초래했는데, 군역을 현물로 납세하는 군역세(軍役稅)로 대신하면서 국가 재정도 군포(軍布)에 의존할 정도였다.

요역(요役)은 보이지 않게 사람들의 고통을 안겨주는 피곤한 제도였다. 원래 이 요역제는 중앙이나 지방관아를 막론하고 관청에서 필요할 때마다 민간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부세제도였는데 그것의 특징은 어떤 보상도 없이(無償) 강제로 사람들을 동원해 노동력을 사역(使役)하는 것이다. 요역제의 사용 형태는 공물(貢物)·진상(進上)·잡물(雜物)의 조달·토목공사·지지(支待, 관리 출장 시 음식과 물품 바라지), 오고 가는 관리의 환영과 송별하는 영접(迎接)·전결미(田結米)의 수송 등 외에 일상적인 잡역도 있었다. 특히 이 정기적이고 일상적인 요역제가 농민층에게 부담이 컸던 것은 바로 공물(貢物)·진상(進上)·잡물(雜物)의 조달 역할 때문이었다.(윤용출, 1998)

요역은 민간에서 징발하는 노동력으로 개인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군역(軍役)·직역(職役)·천역(賤役), 그리고 개별 민호(民戶)에 부담되는 호역(戶役)과 함께 체제의 지배도구를 위한 착취제도인 것이다. 특히 요역은 지방관(고을 수령)에 의지에 따라 필요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제도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요역의 종목이 있는데 이를 테면, 둑 쌓기, 도량 파기, 저수지 준설, 상여 메기, 배 끌기, 목재 운반, 공물 수송, 말 몰이, 얼음 저장, 장례일 돕기, 가마 메기, 길 안내 등 12가지가 나온다. 각 지방마다 특수성이 있어 다르게 적용되며, 제주인 경우 요역에 동원되는 것은 성 쌓기, 방파제 쌓기, 돌담 쌓기, 관아 건물이나 담장 보수에 목재 운반이나 돌담 운반 등의 잡일에 동원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에는 노동력 조달, 노동력 충원(充員)이라고 하지만 이 요역의 적용에 다름아니다. 제주 남정(男丁)들은 집마다 땔감, 촐(꼴), 닭이나 꿩, 계란을 1년에 정해진 일정량을 바쳤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6월 10일 제주도 찰방 김위민의 장계에 의하면, "신이 제주에 (제주에) 도임했을 때 (…) 모두 토호(土豪)들의 불법적으로 양민을 점유하는 일들을 말했습니다. 물으면 모두 말하기를, (…) 수령의 기강이 해이하고, 토호들이 방자한 행동으로 제 마음대로 양민을 점유해 봉족(奉足)이라 일컫고는 부리기를 노예와 같이 하므로, (…) 비록 관청에 호소한들 권세 있는 부호의 농간대로 안 되는 일이 없으니, 원통하고 억울함을 어떻게 해야 풀 수가 있겠습니까.' 하오니, 청하건대 (…) 만일 양민을 강제로 점유해 봉족(奉足)이란 명칭으로 노역시키는 자가 있거든 법에 의해 단단히 응징해 그 폐단을 제거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숙종실록' 숙종 3년(1677) 5월 8일에 의하면 "본주(濟州)의 세 곳의 방파제를 축조한 다음에 나머지 힘으로 역사를 돕게 해야 합니다. 또 본주에는 축장(築墻)한 데가 세 곳을 지나지 않습니다. 소정(所定)의 방군(防軍)을 근처의 민호(民戶)에서 옮겨가되 혹시라도 부족하게 된다면, 사세가 장차 속오군(束伍軍)을 더 주어야 할 것인데, 이 속오군에게 방수군을 겸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두 가지 역사를 하는 것이라고 원통하다 할 것이니, 특별히 호내(戶內)의 잡역(雜役)을 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며 요역과 군역의 고충을 말하고 있다.

속오군(束伍軍)은 15세 이상의 양반과 상민(常民)으로 조직돼 평상시는 군포(軍布)를 납부하고 훈련 때와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 군역(軍役)에 종사하는 군인을 말한다.

#돌문화, 피와 땀 고통과 지혜의 표현

조선시대에는 성 쌓기, 방파제 쌓기, 병력 운용을 위한 밭담 존속 여부, 말 관리를 위한 잣성 쌓기 문제 등 자주 거론이 되었으며, 오늘날 우리 앞에 존재하는 제주의 돌담이 바람, 농작물 보호, 읍성 보호, 외세 방어 등 제주 사람들의 요역 동원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공공 토목사업이 요역으로 동원된 강제노동의 일환이라면, 오밀조밀하면서도 작게 형성된 밭담은 민중의 자발적인 노동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공적인 노동은 노동력 착취였고, 사적인 노동은 생산력을 증대키 위한 소유지의 확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데이비드 네메스(David.j. Nemeth)는 소규모 경작지 경관을 제주인의 지혜로 바라본다. "이런 불규칙한 모양의 경작지는 농촌 마을 주변에 비효율적으로 널리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손실을 최소화 하기 위해 자급적 농부들이 어디에서나 취하는 보편적인 경작 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사전에 조정된 토지 분할과 소유지를 널리 분산시키는 지혜는 홍수, 화재, 해충 등으로 한 곳에서 생산이 위험해지거나 파괴되어도 다른 곳에서는 피할 수 있는 오랫동안 검증된 신뢰할 수 있는 농작물 보험전략이다."

돌문화는 재앙이자 고통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이를 극복한 제주 민중의 지혜로운 자주적 소유정신의 표현이었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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