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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9)과거제도의 겉과 속(2)
급제·낙제 두고 지식인들 일희일비… 공복인가, 노복인가
유재선 기자 sun@ihalla.com
입력 : 2019. 08.22. 00:00:00

인문학·아문학 발전 긍정 효과속
팔고문 등 과거만의 형식·내용도
공부와 인품이 비례하지도 않아
왕안석 등 과거 개혁에 목소리
오랜 존속 끝 1905년 8월 폐지
가오카오 등 현대판 과거 존재


달 지고 까마귀 우는데 하늘엔 서리 가득/강가 단풍나무와 배의 등불 바라보다 시름에 겨워 잠드는데/고소성 밖 한산사/한밤중에 울리는 종소리 객선까지 들려오누나.(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청대 팔고문 시험지.

당 천보天寶 12년(753년) 예부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리 임명 여부를 확정짓는 이부吏部 전형(속칭 관시關試)에서 떨어져 귀향하던 차에 소주蘇州에 들른 장계張繼가 자신의 시름을 노래한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전당시全唐詩'에 실려 있는 그의 시 가운데 유일하게 인구에 회자하는 시이자, 한산사를 유명하게 만든 시이기도 하다. 공명과 이록利祿을 보장하는 과거 급제이니 문사들이 말달리듯 몰려드는 것은 당연지사이나, 급제하면 그야말로 안 되는 일이 없지만 낙제하면 참으로 되는 일 하나 없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새도록 오로지 계수나무 가지 꽂아보려는 일념으로 책속에 파묻혀 피땀을 흘렸는데"(조하趙蝦, '하제상이중승下第上李中丞'), 또 낙제라니! 하여 유, 무명의 시인들이 적지 않은 낙제落第 또는 하제下第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는데 삽시간에 진흙 구덩이에 빠져 그저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꼴이 되었음을 자탄하니 구구절절 마음 아프다. 물론 급제자들이 춘풍에 득의하는 기쁨을 노래한 시도 있다. 급제와 낙제를 사이에 두고 한 나라의 지식인들이 울고 웃기를 반복하니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인력낭비가 우심하다.

중국 청소년들이 현대판 과거시험인 가오카오(高考)를 통과하기 위해 '열공'하는 모습.

과거는 인재선발이라는 기본적인 목표를 위한 제도이다. 이를 통해 중국의 문관 중심의 정치제제, 즉 중국 관료체제가 완비되었다. 취사取士의 등용문인 과거가 문관을 위주로 선발했으니 당연하다. 실제로 당송은 물론이고 명청대에도 무과는 설치되어 있었으되 무관출신으로 중앙 고위관직에 오른 이는 거의 없다. 굳이 거론하자면 명대 무장 척계광戚繼光 정도인데, 그는 무과를 본 것이 아닐뿐더러 재상 장거정張居正의 추천으로 고위급 장성에 올라 왜적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장거정이 죽자 탄핵을 받아 몰락하고 말았다. 남송의 명장으로 당시 최정예 군단인 악가군岳家軍을 이끌고 금나라와 맞서 싸운 악비岳飛 역시 진사급제하여 재상에 오른 진회秦檜의 무고(죄명은 막수유莫須有(혹시 죄가 있을 지도 모른다)였다)로 죽임을 당한다. 반면에 문관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변방 생활을 한 이는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송대 범중엄范仲淹은 진사급제한 문관이었으나 서북 변방에서 4년간 군대를 이끌었다. 문관 위주의 사회가 되다보니 송대처럼 인문학이 발흥하고, 시문 위주의 아문학雅文學이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역효과 역시 만만치 않았다.

청말 학자 유월이 쓴 '풍교야박'. 과거에 떨어진 장계가 자신의 시름을 담아 노래한 시다.

과거에서 중시하는 것은 유가 경전(명경과)과 시문(시부와 책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전을 달달 외고 시문을 잘 짓는다고 해서 정치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만의 내용과 형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명청대 과거는 팔고문八股文이라는 독특한 문체를 사용해야만 했다. 두 개의 넓적다리(股) 네 개, 즉 여덟 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문체로 파제破題, 승제承題, 기강起講, 입수入手, 기고起股, 중고中股, 후고後股, 속고束股로 나누어진다. 쉽게 말하자면 기승전결起承轉結을 8가지로 나누어 놓은 셈이다. 문제는 주희의 '사서집주'에서 인용한 몇 개의 글자이고, 처음은 두 구절로 제목의 뜻을 설명하는 파제로 시작해야 한다. 이후 문장은 대련으로 의미나 글자수가 맞아야 한다. 형식이 내용을 얽매고, 내용은 유가의 사서에 막혀 있다. 글의 내용과 형식이 얽히고 막혔으니 생각과 관념이 어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하여 중국의 명문 가운데 팔고문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송대의 경우 소식의 '성시형상충후지지론省試刑賞忠厚之至論'(소식이 22세 때 예부 진사시험에 제출한 답안지) 정도만 거론될 뿐이다. 긴장된 상태에서 정해진 방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시험 답안지에서 어찌 명문을 얻을 수 있겠는가? 또한 공부와 인품이 항상 정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천하의 근심을 남들보다 앞서 고민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남들보다 늦게 즐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범중엄范仲淹), '악양루기岳陽樓記'고 자부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몇이나 되었을까? 청백리는 적고 탐관오리는 수없이 많았다. 관리의 녹봉이 영 형편없었고 관직이 인원보다 적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렇다면 빈곤이 오리汚吏를 부른 셈인가? 아니다. 탐욕이 탐관貪官을 만들었을 따름이다.

진사급제한 문관으로 서북 변방에서 4년간 군대를 이끌었던 송나라 범중엄 초상.

역대로 과거개혁의 목소리가 높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북송 왕안석王安石이다. 새로운 과거법의 핵심은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과거는 진사과만 설치한다. 둘째, 반드시 학교 교육을 통한 승급을 거치도록 하고 마지막에 중앙에서 통일된 과거시험을 실시한다. 셋째, 기존의 시부詩賦 등 문학과목을 폐지하고 경의經義와 책론策論으로 바꾸며, 전시는 논책 한 가지로 제한한다. 넷째, 학교 교육과 과거시험의 과목을 경전으로 제한하여 사상적 통일을 기한다. 그의 개혁안은 당시 격렬한 논쟁이 있기는 했으나 이후 명청 시대까지 계승되었다. 명청대의 과거시험 형식인 팔고문八股文은 그의 경의에서 변화 발전한 것이며, 학교교육을 통한 승급 역시 명청대까지 이어졌다.

과거 부정행위 증거. 저고리 가득 경전이 적혀있다.

개혁은 이루어졌으되 과거는 여전히 존속하다가 1905년 8월 4일 조칙에 의해 폐지되었다. 오랜 세월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그나마 공정한 인재선발 제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외에도 청대에는 금전으로 얻는 관직을 얻는 연납捐納, 고관 자제가 황제의 은상으로 관직을 얻는 임음任蔭, 하급관리를 선발하는 이선吏選 등 관리가 되는 방법이 존재했다. 하지만 과거만큼 핫한 시험은 없었다. 과거는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시험이 젊은이들을 옭죄고 있다. 매년 6월 7, 8일이 되면 보통고등학교 학생모집 전국 통일시험(약칭 가오카오高考)이 전국에서 실시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직장을 얻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정해진 공식에 따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불철주야 시험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청대 과거시험 계통도 .

현재 거의 모든 나라에 관료체제가 운용되고 있다. 민주제도가 서구에서 들어온 것은 사실이나 관료체제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봉건귀족 정치를 운용했던 유럽의 경우 18세기 말까지 보편적인 관료 선발과 관료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입법권이 국왕에게 집중된 전제 군주 정체 하에서 지명된 관리에게 명령권을 부여하여 행정법과 공법의 근원이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리는 귀족들이 맡거나 국왕의 명령에 따라 선출되었을 뿐이다. 이와 달리 중국은 수, 당대부터 과거를 통해 관리를 배출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관료체제를 완비했다. 문제는 관료가 공복公僕이자 또한 노복奴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전제 군주체제에서 관리가 공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학의 근본 사상이 위민爲民 정치에 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막강한 전제군주의 대리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청조 태감이나 만족 관리들이 황제 앞에서 자신을 노재奴才라고 부른 것이 친근의 표시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스리는 것은 정상을 참작할 수 있으나 황제의 역린을 거슬리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 충성하겠는가? 백성인가? 황제인가?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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