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권엔 왜 황희같은 재상이 없을까?
2016-09-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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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룡 (Homepage : 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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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의 명재상 황희 정승의 일화이다. 하루는 집안의 여자 하인들끼리 다툼이 일어났다. 서로 시끄럽게 싸우다가 한 여종이 황희에게 와서 싸움의 경위를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고 상대방 하인이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일러 바쳤다. 다 듣고 난 황희는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였다. 잠시 후 또 다른 하인이 와서 자기 나름대로 싸움의 경위를 설명하고 나서 상대방 하인이 나쁘다고 말했다. 그러자 황희는 또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였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황희의 조카가 나섰다. “아저씨, 두 사람 중 누가 옳은지 분명한 판단을 해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황희는 “네 말도 옳구나.”라고 대답하였다. 빈곤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국가에게 있을까? 개인에게 있을까? 서양의 중세 이전에는 봉건사회의 신분 질서의 지배를 받으면서 빈곤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 일반적인 사상이었다. 개인이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그 사람의 무능이나 개인적 게으름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자선(慈善) 내지는 시혜(施惠)의 차원에서 빈민을 구제하는 선별적 복지정책을 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금력(金力)에 의한 새로운 신분 질서가 형성되게 되었다. 중세 이전의 왕족이나 귀족 신분의 특권층이 사라진 대신 돈을 많이 가진 부자가 사회의 새로운 상위 계급으로 등장하게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금력을 소유한 자본가의 독과점의 횡포와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을 막을 수 없었다. 오늘날 100억 원의 돈을 가진 사람이 한 해에 1억 원을 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전세금 2천만 원이 전 재산인 사람이 한 해에 1억 원을 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폐단은 부자계층과 빈자계층을 각각 세습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대두시킨 것이다. 빈곤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익 내지 보수주의자들은 빈곤의 일차적 책임을 개인에게 있다고 본다. 반면 좌익 내지 진보주의자들은 빈곤의 일차적 책임을 사회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국가 전체 경제의 성장을 위주로 하는 정책을 추구하고 진보주의자들은 국가경제의 성장 보다는 개인이 가진 부의 분배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주장한다. 우리나라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은 성장위주의 정책을 편 반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분배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면 보수가 좋을까? 아니면 진보가 좋을까?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제 국가들은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이 높았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성장 위주의 정책을 펼친 반면, 이들 동남아 국가들은 경제 성장을 일단 뒤로 미룬 채 민주화(분배)부터 추구하였다. 우리나라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이루어 놓은 경제성장을 밑거름으로 하여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효과적인 분배정책을 펼칠 수 있었고 민주화도 완성할 수 있었다.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 수준은 아직도 1960년대에서 머물러 절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그들이 추구한 민주화는 완성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아직도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투쟁 중이다. 우리 민족의 우수성은 여기에 있다. 만일 경제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분배 정책을 추구하였다면 동남아 국가들처럼 아직도 절대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보수정권에서 진보정권으로 바톤이 자연스럽게 인계되면서 매우 바람직한 과정을 밟아 온 것이다. 보수 정권이 이뤄놓은 경제성장의 토대위에 진보 정권이 효과적인 분배정책을 펼친 것이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우가 있으면 좌가 있듯 보수가 있으면 진보가 있어야 한다. 우는 무조건 잘된 것이고 좌는 무조건 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반대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흑이 아니면 백,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방식의 이른바 흑백논리는 우리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진보든 보수든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성장과 분배 중 어느 하나만을 추구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은 상당히 높다. 복지 선진국의 모본으로 여겨지는 북유럽의 제 국가보다는 못하지만 미국 복지 수준은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오히려 의료 분야는 우리가 앞선다. 이러한 복지 수준은 거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이뤄놓은 것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이루어 놓은 경제발전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복지정책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동남아 제국에서 보듯 돈이 없이 복지를 할 수는 없다. 필자는 황희 정승의 일화로 서두를 시작했었다. 언뜻 보면 황희 정승의 태도는 주관이 없어 보인다. 세상일에 대한 시비를 논할 때 우리는 보통 한쪽의 입장만을 듣는 수가 많다. 오히려 황희가 취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을 나의 것으로 한번 바꿔 생각해 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어쩌면 황희의 태도가 주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주고 배려할 줄 아는 태도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금에 안타까운 현실은 이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좀 더 심한 것 같다. 진보는 무조건 자기네가 옳다고 하고 보수 역시 무조건 자기네가 옳다고 하면서 핏대를 올린다. 황희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둘 다 옳다. 서로 장단점이 있다.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이 끝나가고 있다. 약간 보수 성향인 필자가 이 정권에 대하여 상당한 ‘식상감’(食傷感)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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