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우의 한라칼럼] 제주다움이 사라지면

[송창우의 한라칼럼] 제주다움이 사라지면
  • 입력 : 2022. 10.18(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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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한여름 뜨거운 태양과 태풍과 모진 비바람이 몰아쳐도 가을이 찾아왔다. 예전엔 오름과 들판에는 잎겨드랑이에 길고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가지마다 붉은 열매가 달린 굿가시낭(꾸지뽕나무)과 작고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은 볼레낭(보리수나무)도 흔하디 흔했다. 양지바른 곳에는 물매화 몇 그루가 청초하게 하얀 꽃을 피우고, 너무 많은 홍자색 꽃을 피워 쑥스럽지도 않은 노리지리(향유)가 짙은 향기를 뿜으며 벌을 불렀다. 키 큰 서어나무와 졸참나무에는 검은 씨를 싼 과육을 품은 졸갱이(으름덩굴)와 운이 좋다면 작은 열매를 포도송이처럼 매단 흑오미자도 볼 수 있었다. 예전 제주의 가을은 이런 풍요로움으로 새들과 짐승은 물론 벌레들을 유혹하고, 제주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호강시켰다.

요즘 제주 가을 산야는 키 작은 풀과 나무는 끅(칡)으로 덮여 이미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먹구실낭(멀구슬나무)도, 개낭(누리장나무)도, 삼나무들도 칡나무로 변하고 말았다. 그뿐인가. 도로에 세워진 교통표지판과 전봇대를 오르고, 언덕 또한 칡산이 됐다. 심지어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에도 그 줄기를 뻗고 있으니 제주의 가을은 칡의 계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칡은 뻗어나가다가 땅이 나타나면 마디에서 다시 뿌리를 내려 독립해 어미가 없어졌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어쩌면 이들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을 스스로 아끼지도 못하면서 칡만을 탓할 수는 없을 듯하다.

어느 날인가 어디선가 왔는지 모르지만 살마(반하) 한 무더기가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화분으로 옮겨 심었다. 제주에서 생산된 반하는 고려시대 때부터 아주 귀중한 수출품이었기에 이를 번식시켜볼 요량이었다. 학이 고개를 든 것처럼 우아하게 꽃줄기도 올리며 잘 적응하는 것 같더니 어느 날 벌레들이 찾아들어 잎사귀를 먹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을 숨겨주던 이파리까지 먹어치우는 순간 그들의 몸이 노출돼 새들의 먹이 신세가 돼버렸다. 잎사귀가 모두 사라진 반하의 운명 역시 오래갈 수 없는 일이다.

자기 몸을 숨겨주는 것을 모두 먹어치워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반하 잎사귀 전체를 먹어치웠던 벌레만일까.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해안에서부터 오름 자락까지 도로가 뚫리고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게다가 대규모 농사가 이뤄지고 있다. 칡이나 삼수세(환삼덩굴)와 같은 덩굴식물들만 번창해 다른 식물들을 덮고 있으니 다양함도, 제주의 모습도 사라지고 있다. 이게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심각함이 있다. 말이 없는 지구는 뜨거움과 태풍, 물난리로 몸부림치며 인간의 탐욕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푸른 바다와 원시림으로 이루어진 지구 전체를 먹어치우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비약한 것일까.

사랑할 줄을 모르면 두려워할 줄이라도 알아야 한다. <송창우 제주교통방송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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