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영화觀]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 입력 : 2021. 10.01(금)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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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정동진 독립영화제.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어딘가로 가게 된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은 콘서트가 열리는 공연장을 찾고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서점과 도서관으로 향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은 코로나 시국임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극장을 찾고 더 나아가 사랑하는 영화를 더 빨리 보고 즐기기 위해 영화제 현장을 찾는다. 어느 순간 극장들이 사라져 버리고 문 닫은 공연장들의 기약 없는 기다림이 길어지는 시대다. 편하고 안전하고 저렴하게 콘텐츠를 공유하고 소비하는 OTT 플랫폼들이 전성기를 맞고 있는 이 시기에도 오직 사랑하는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사랑을 증명한다. 무모함 만이 진짜 사랑의 얼굴은 아니겠지만 계산 속 없는 돌진만큼 탁월한 사랑의 표현이 또 있을까.

 올해로 23회째를 맞는 정동진 독립영화제는 매년 여름 강원도 정동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야외 영화제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매년 8월 초, 해변과 멀지 않은 한여름 저녁의 학교 운동장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단편과 장편 독립 영화들을 상영해 오고 있다. 영화 상영은 노을이 넘어가는 저녁 시간에 시작해 어느덧 별이 뜨는 밤까지 이어진다. 영화 상영 중에는 정동진 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를 지나가는 기차의 불빛과 기적 소리가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오고 모깃불의 쌉쌀하고 포근한 연기가 운동장 군데군데에서 피어오르는 쉽게 만나기 힘든 낭만적인 시공간의 영화제다. 정동진 독립 영화제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것은 시상의 영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적게는 몇 백 크게는 억대에 이르기까지 상금이 걸린 영화제들과는 다르게 정동진 독립영화제는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관객상만을 수여하는 영화제다. 영화 상영을 마친 뒤 관객들은 자신이 즐겁게 관람한 작품의 제목이 적혀 있는 동전통에 동전을 넣고 동전 금액을 합산해 관객들이 선정한 '땡그랑 동전상'을 작품의 창작자에게 전달한다. 많게는 몇십만 원가량의 상금이 주어지는데 상을 받은 이들은 그 작은 영광에 큰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한다. 수상자들이 동전들로 무엇을 하는지 늘 궁금한데 아마도 귀여운 소비를 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23년이라는 짧지 않은 정동진 독립영화제의 역사는 이렇게 이 영화제가 가지고 있는 사랑스러움과 그 사랑스러움을 함께 만들어온 관객들의 소중한 여름 일기들 덕분일 것이다.

 올해 정동진 독립영화제는 8월 초가 아닌 9월 중순에 개최됐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 단계의 영향으로 영화제 시작 이래 최초로 가을 운동장에서 관객들을 맞이한 영화제 풍경은 사뭇 달랐지만 그 무드는 여전했다. 일몰 시간이 다소 앞당겨진 탓에 영화와 별은 더 빨리 조우했지만 기차는 여전히 같은 시간에 운동장 주변을 돌며 인사했고 언뜻 들리는 파도 소리와 운동장 모래에 스민 바다 내음 또한 다를 것이 없었다. 예년보다 쌀쌀한 날씨 탓에 두툼한 옷을 껴입은 관객들은 마스크를 쓴 채로 크게 웃고 박수를 쳤고 비가 내리면 우비를 입은 채로 영화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물론 영화 상영이 끝난 후 체육관에서 열리던 떠들썩한 뒤풀이도 없었고 낮의 해변에서 펼쳐지는 물놀이와 짜장면 먹기 같은 이벤트도 진행되지 않았지만 늘 이곳에 오면 만나게 되는 반가운 얼굴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일에 감사했고 지난해 정동진에 새로 생긴 독립서점 '이스트씨네'에서 영화 관련 책을 골라 해변가에 앉아 읽는 새로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음에 행복했다.

 5성급 숙소도 없고, 그 흔한 프랜차이즈도 없는 정동진에는 여전히 작은 숙박 업소들과 오래된 민박집들이 있고 정성껏 밥과 찬을 내주는 식당들과 어디서도 바다의 곳곳을 바라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페들이 있다. 저녁 영화 상영 전 오후에 가게와 살림집이 붙어 있는 정동진 곳곳의 골목길들을 걷다 보면 숙소가 있냐고 묻는 정겨운 목소리들이 들리는 데 있다고 대답하면 다음에 오라는 대답이 다시 건너온다. 다음에 오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라 민박집의 전화번호를 사진으로 찍어두고 걷는다. 걷고 바다를 보고 밥을 챙겨 먹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과 안부를 묻다 보면 며칠 되지 않는 영화제 일정은 금세 지나가 버린다. 아쉽기도 충만하기도 한 마음으로 파도의 코 앞에 자리 잡은 정동진 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린다. 눈앞에선 밤바다의 파도가 출렁이고 머릿속에선 이곳으로 올 때의 풍경이 다시 재생된다. 서울에서 정동진으로 향하는 기차 편을 예매할 때는 반드시 좌측을 택해야 한다. 기차가 강릉역을 지나 정동진으로 향하는 10여분 간 펼쳐지는 해안을 마주 보며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당신이 반드시 영화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영화제에 참여할 만큼 열정적이지 않더라도 이 온도, 이 습도, 이 별빛의 추억을 한 번은 담아 보기를 권한다. 부디 내년 영화제는 다시 8월 초에 뜨겁게 열리기를 기도한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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