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32)서귀포시 하원동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32)서귀포시 하원동
자연이 내려준 경관에 역사를 입혀 친환경 개발로 기지개
  • 입력 : 2015. 03.17(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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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과 구산봉(위), 절벽해안이 아름다운 머내바당(아래).

왕자묘·법화사·무오법정사 등 유서 깊은 마을
마을소유 목장 등 넓은 대지로 종합관광지 개발사업 열망
최근 농산물 직거래장터 등 다양한 주민소득 증대 도모
주민 스스로 마을발전에 총력…다가올 미래는 '희망적'

오백장군 혹은 오백나한이라 부르는 기암절벽 영실기암(해발 1600m)이 지적도 상으로는 하원동 산1번지다. 그 곳에서 남쪽으로 달려 내려와 절벽을 이룬 머내바당까지 온통 역사의 향기가 서린 마을. 영실의 정기와 혈맥이 흐르는 줄기 위에 펼쳐진 자연경관과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은 왕자묘(제주도 기념물 54호)에서 보듯 탐라국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남북으로 길게 뻗은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을까? 제주문화원장을 역임한 하원 출신 조명철(82)씨가 밝혀줬다.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시기, 제주 또한 그 지배를 받고 있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영실기암 지역에 상원사(上院寺)가 있었고, 지금 법정악 부근에 중원사(中院寺), 그리고 법화사 일대 하원마을 지경에 하원사(下院寺)가 있었는데 하원사라고 하는 원나라 황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대한 가람과 주변 영지를 하원이라 부르다가 하원(河源)이 되었다." 불교와 연관성이 뚜렸한 마을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실 인근 존자암에서부터 법정이오름 법정사, 그리고 천년 고찰 법화사에 이르는 흐름도가 이를 말해준다.

하원동 산1번지인 영실기암.

해상왕 장보고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법화사를 중심으로 하원동의 역사는 연관 지어져 있다. 그 시대 해상세력의 거점으로 섬 제주의 어느 곳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만하다. 1990년대 법화사지(제주도 기념물 제13호) 발굴 과정에서 타임캡슐에 가까운 명문기와가 수습되었다. 삼별초가 입도하기 전에 중창을 시작해서 10년 후에 마쳤다는 기록이다. 중창이라고 함은 그 이전에도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이며, 원나라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있는 탐라총관부 시절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동북아 정세로 보아 이 지역은 법화사라고 하는 거대한 사찰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세력의 활발하게 움직이던 곳. 원과 명의 교체시기에 출현한 명의 제후국 조선의 왕 태종 8년(1408년), 기록은 말한다. '법화사 노비가 무려 280명에 이르니 이를 30명으로 줄였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사원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 오롯이 하원동의 유구한 역사의 한 줄기가 된다. 유난히 절과 관련된 지명이 많은 이유도 알게 되고.

주민들이 물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마을 이름에 물이 들어가게 한 연유는 뭘까. 수량이 풍부하여 논농사를 많이 했을 정도로 미작지역이었다. 법화사 내에 법화수는 그 옆 원두물과 함께 물맛이 좋고 시원하기로 제주에서 으뜸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1940년대에 상수도를 사용한 마을이다. 1985년까지 하원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법화수를 사용하였다. 지명이 광덕코지라고 하는 원만사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일품이다. 말과 뜻 그대로 약이 되는 '약수'(藥水)다.

법화사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석조유물들.

항일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기미년 삼일운동보다 5개월 먼저 400여명이 무장하여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사건이었다. 해발 680m 법정악 능선에 있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도지정 기념물 제16-1호)를 찾았다. 설명판에 적힌 '1919년 2월 4일 실형선고 31명, 벌금 15명, 재판전 옥사 2명, 수감 중 옥사 3명' 저 분들의 벌초와 제사를 하원마을 후손들이 하고 있으리라.

마을회가 보유한 땅이 7만 여 평, 마을목장조합 땅이 35만 평이나 된다. 탐라대학 부지를 '교육용 목적'을 단서로 달아서 양도한 주민들이다. 선비들이 많이 배출 되었던 문화적 전통이 교육에 대한 존중감으로 자리매김 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탐라대학교 부지 문제로 갈등이 있긴 하지만 낙관하고 있었다. 다른 용도로 변경은 제주도지사가 쥐고 있기 때문. 땅투기 여지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오상호 회장

오상호(52) 마을회장이 밝히는 주민들의 포부는 "마을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와 주변 환경이 절경이므로 이를 활용하여 친환경적인 종합관광지로 개발한다"는 것. 둘레길과 같은 자연친화적 환경이 제공된 마을의 장점을 충분하게 살리면서 한라산 방향으로 1100도로, 동으로는 도순과 남으로 월평, 강정, 서쪽으로는 대포와 중문과 잇닿은 교통의 요지로 부상하고 있는 마을. 최근 농산물 직거래를 비롯하여 다양한 주민소득 증대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자립마을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도 다가올 미래를 능동적으로 개척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이수옥(51) 부녀회장의 꿈은 소박하다. 부녀회 사무실이 있으면 마을발전에 보탬이 되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39세 나이에 자녀를 5명이나 둔 강종환 청년회장이 꿈꾸는 하원동의 미래는 스케일이 컸다. "30년 뒤, 큰 딸이 44세가 되었을 때, 하원은 종합적인 관광지로 변해있을 것이다. 마을이 운영하는 면세점이 있을 것이며 중산간 일대 마을 부지에 관광시설에 근무하는 자녀들이 많아 외지에 나가있는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들어와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 청년들은 시설 좋은 복지관에서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하원마을에서 바라본 한라산.

역사 자원이 이렇게 풍부한 마을이 제주에 또 어디 있을까. 머내바당 절벽에서부터 영실까지 곳곳에 숨어 있는 사연과 비경들이 세상에 제대로 등장하지 않았다. 지금은 도시와 농촌이 혼재된 모습으로 보인다. 1490명이 넘는 주민들이 마을이 지닌 역사성과 자부심을 이어가면서 힘차게 달려가고 싶은 곳이 분명 있다. 옛 탐라대학교 4거리가 관광산업을 기반으로 상업지구로 탈바꿈 될 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회장에게 물었다. 한 세대 30년 뒤에 주민들의 농업과 관광산업 종사 비율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3:7 정도로 내다보고 있었다. 위기 의식과 함께 기대감의 표출임엔 틀림없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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