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22)한림읍 월령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22)한림읍 월령리
  • 입력 : 2014. 12.30(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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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방향으로 바라본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 마을전경과 돌담위에 늘어선 손바닥 선인장.

돌무더기로 뒤덮인 곶자왈 개척 삶의 터전 일궈낸 마을
천연기념물 선인장 군락지…약용식물로 농업소득 일조
10년 전부터 마을만들기사업…문화예술 체험마을 지향
작지만 특별한 휴양지 꿈꿔
바람코지 마을의 장점 살려 풍력발전사업 원했지만 무산
전기세 걱정없는 마을 꿈꿔




한림읍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 독특한 마을이다. 신석기 유적인 한들굴이 있다. 그 안에서 출토된 삼각점렬무늬가 장식된 토기 아가리편과 사슴다리뼈로 만든 긴 주걱모양 뼈 연모로 볼 때 사람이 살았던 시기를 추론할 수 있다. 철기시대 유물로 적갈색 경질 두드림무늬 토기편과 애월읍 곽지폐총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경질무문토기편 등 다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탐라순력도 한라장촉 부분에 원룡포(元龍浦)라고 표기된 곳이 지금의 월령포구라고 추정하고 있다. 월령리 지명은 원룡포와 발음의 유사성에서 연결고리를 찾기도 한다. 그것은 한자 표기라 해두고 이 마을 땅을 이르는 지명은 '가문질' '거문질'로 지칭되어 왔다고 한다. 마을 원로인 양창부(90)님은 어린시절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이야기로 그 뜻을 설명한다. "온통 검은 빌레와 돌무더기로 덮여있는 곶자왈 지대에 들어와 돌들을 걷어내는 작업으로 밭과 집터를 마련했다." 새까만 현무암을 먼저 떠오르게 하는 지역이었기에 거문질(검은 길)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삶의 터전 대부분이 돌무더기들을 걷어내며 이룩한 터전. 그 집념에 머리 숙인다. 제주의 그 어떤 마을보다 생존 공간 마련에 노동력이 가장 많이 들어갔다. 제주인의 개척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살아있는 박물관.

독특하게 구성된 한림읍 월령포구

손바닥 선인장이라는 강렬한 이미지가 이끄는 조용한 마을. 자생 상태와 보존성을 인정받아 선인장 군락지가 천연기념물 제429호로 지정 보호되는 곳이다. 그냥 군락지만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200만 평이 넘게 선인장 밭이 있다. 농약과 비료를 싫어하는 특성을 가진 약용식물,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아 백년초, 천년초라 불리고 있기에 소중한 농업소득원이기도 하다. 오뉴월 경에 수천만 송이의 선인장 꽃들이 피기 시작 하면 경이로운 장관을 이룬다. 농업이 지닌 경관적 가치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손바닥 선인장이 가진 스토리는 얼마나 감동적인가. 멕시코가 원산지다. 오랜 옛날, 태평양에 떨어진 손바닥선인장 열매 하나가 페루해류와 남적도해류가 만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항로를 잡고 항진했을 것이다. 타이티에서 잠시 쉬고, 키리바시까지 흘러온 후, 마샬제도 틈바구니를 지나 괌에 잠시 들렀다가 쿠로시오난류를 기다려 꿈에 그리던 제주도 월령리 바닷가에 당도했다는 이야기. 오는 과정에서 섬 한 곳에서 100년을 뿌리내렸다가 다시 바다로 뛰어들며 왔을 것이다. 스토리텔링이 따로 있을까? 해류를 타고 지구의 정 반대편 제주섬까지 도착한 집념의 식물에게 존경심을 보내게 된다. 다가올 국제자유도시 제주-글로벌 마인드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해안가 바위에 붙어 자라며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손바닥 선인장.

147세대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엄청난 잠재력이 숨어있다. 마을 만들기 사업에 뛰어들어 그 진가를 인정받는 마을이기도 하다. 2009년 '베스트마을만들기'를 시작으로 2010년 '참살기좋은마을' 그리고 작년부터 농림부 공모예산을 가지고 경관종합정비사업에 뛰어들어 이미 기본계획 수립 단계에 돌입해 있다. 10년 넘게 지속적으로 임무를 맡고 있는 박용수 이장은 마을 결속력을 바탕으로 궁극 목표를 분명하게 정하고 있었다. "문화예술 체험마을로 발전시켜서 작지만 특별한 휴양지가 될 것이다"이라며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사업들이 목표를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시련도 있었다. 풍력발전과 관련하여 마음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진행형이고. 월령리는 바람코지다. 풍력발전에 필요한 양질의 바람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이 분야 전문가들은 이미 30년 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전국 최초로 신재생 풍력에너지 연구소가 자리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월정으로 옮겨갔지만. 이런 연구소가 있었던 관계로 마을 사람들은 풍력발전이 가진 부가가치에 먼저 눈뜨게 되었다고 한다. 2007년부터 풍력발전기시설에 필요한 절차를 밟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허가 과정에서 '바람이 가진 공공재'논의가 도의회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당시 법으로 건설할 수 있었던 풍력발전기가 국회에서 새로운 법을 만들고서야 가능한 형국으로 바뀌게 되고 부푼 꿈을 가지고 있던 주민들은 실망과 당혹감 속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민간투자에 의해서 마을 발전에 도움을 얻고자 한 일이 한 해 한 해를 거듭할수록 무너지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전국 최초의 풍력에너지 연구소가 들어와서 선점효과를 누릴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마을에서 더 많이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의 억울함을 집중적으로 토로하는 강한철 청년회장은 "이것은 차별입니다. 준비하고 또 준비해온 숙원 사업이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지요." 행정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박용수 월령리장

"30년 뒤, 월령리는 어떤 모습으로 변모해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답하는 것은 풍력에너지와 연관된 혜택이었다. 가구마다 소형풍력발전시설이 설치되어 전기세 걱정 없는 마을로 변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월령리 바람자원의 소중한 가치를 내면에 가득 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 스스로 가꾸어온 꿈이 풍력에너지만은 아니었다. 다양한 관점에서 월령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꾸준하게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마을 풍광도 아름답지만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이 더 가치있어 보인다. 강정선 부녀회장이 꿈꾸는 미래는 단연 복지 혜택을 풍요롭게 누리는 노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자마을이 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마을처럼 재일동포가 재단을 만들어서 마을 노인 복지에 힘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지만 마을 주민 스스로 다양한 마을 사업을 성공시켜 마을복지재단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월령리에 시집을 오면 모든 교육비는 마을복지재단에서 충당해주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마을공동체의 힘으로 한 가족처럼 후세를 키우겠다는 당찬 포부다. 스스로 만들어서 누리는 혜택에서 인생의 참 맛을 얻고자 하는 월령리 사람들. 분명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공할 것이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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