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路 떠나다]겨울 사려니숲길

[길 路 떠나다]겨울 사려니숲길
눈길을 걷다보면 어느덧 가슴 시린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
  • 입력 : 2014. 12.26(금) 00:00
  • 강봄 기자 spri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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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내 녹음으로 우거졌던 사려니숲길이 새하얀 겨울옷으로 갈아입으면 신비스러운 기운이 절로 느껴진다. 사려니숲길을 찾은 관광객들이 제주의 겨울 숲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한라일보 DB

녹음에서 하얀 겨울옷으로 갈아입은 설경 매력
눈꽃가루 뿌려놓아 모든 게 보일듯 말듯 몽환적

뽀드득, 뽀드득….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유난히 길게 뿜어져 나오는 희뿌연 입김 사이로 무어라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름 내내 녹음으로 둘러싸였던 사려니숲길이 새하얀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겨울이 오기 전 울창한 숲에서 내뱉는 피톤치드(Phytoncide. 숲 속의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살균성을 지닌 모든 물질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로 심신을 치유했다면, 요즘엔 하야디 하얀 눈을 보기만 해도 절로 치유가 되는 듯하다. 그야말로 에코힐링(Eco-Healing. 자연 속에서 치유력을 회복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누리는 것)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치유의 숲이다. '숲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합니다.' 숲길에 내걸린 현수막 문구다.

겨울왕국 숲으로 들어서자 눈이 소복히 쌓여 있는 징검다리가 보일락 말락 하다. 아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게 보일 듯 말듯, 몽환적이고 신선함을 안겨준다. 평소와 다른 사려니숲을 느낄 수 있다. 눈 덮힌 숲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사려니'의 유래처럼 신비스러운 기운이 절로 느껴진다.

갈 길이 제법 멀다. 중간 중간 표지판이 어서오라고 하는 동시에 어디론가 가보라고 권한다. 초콜릿색 물감을 머금은 표지판과 그 위에 내려앉은 하얀 눈의 조화가 이채롭다. 굽이굽이 오솔길이 보일 때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숲길이 궁금하다. 이번엔 어떤 설경이 눈앞에 펼쳐질까.

제주시 교래리 비자림도로의 설국 풍경.

잠시 벤치에 앉아 쉬고 싶지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눈으로 뒤덮힌 벤치가 말없이 다소곳이 서 있어 그 모습 그대로 지켜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이들이 이 벤치에 앉아 잠시 쉼표를 찍었을 것이다. 그 동안 그들을 맞이하느라 힘에 겨웠을 것을 생각하면 가볍게 보이는 흰 눈에게 그 자릴 양보해도 좋을 듯싶다. 의외로 하얀 솜털 이불을 덮은 듯 포근함이 느껴진다.

무심코 걷다보니 온종일 재잘거리던 숲이 묵언수행(默言修行)중인 듯 고즈넉하다. 녹음으로 뒤덮일 동안 쉼 없이 종알거렸던 탓인가 보다. 어떤 이들은 나무 정령들이 외로울까봐 말동무로 '올라프'를 곁에 뒀다. 참고로 올라프는 영화 겨울왕국에서 마법에 걸린 눈사람이다.

사려니 숲길 입구.

이런들 저런들 눈꽃가루를 뿌려 놓은 듯 새 하얗다. 철 지난 억새에서는 뭔가 모를 아쉬움이, 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녹색 잎새에선 그리움이, 갈색으로 퇴색해 초라하기까지 한 작은 꽃나무에서는 기다림이 느껴진다. 지금은 훌쩍 지나가버린 가을, 여름, 봄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오감을 자극하는 한 폭의 수채화다. 발자국 하나 없이 소복히 쌓인 광경엔 한걸음에 빨려 들어가고픈 생각이 들 정도로 무척 매력적이다.

올라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내가 원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거야." 겨울 사려니숲길에 오면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 사랑이 더 애틋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숲은 발만 담궈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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