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6)구좌읍 월정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6)구좌읍 월정리
  • 입력 : 2014. 11.18(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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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해수욕장과 해안도로(위). 월정리 마을 전경(아래).

세계유산마을 이면에 감춰진 아픔 간직
법적 규제로 경작지 70% 묶여 재산권 제약 "하소연"
"카페 등 20여 곳 성업… 경관 헤치는 건물들만 즐비"





화산회토와 사질토양, 얇게 흐른 용암들이 만든 빌레, 굵은 암반, 모래와 바람이 범벅이 되어 척박함을 떠오르게 하는 마을.

지금은 그 마을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가 화려하다. 유네스코 제주 세계자연유산마을.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남지미동굴이 있어서다. 마을 지하에 이 동굴들이 지나가고 있다. 지질 생태 자원을 가지고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자부심. 그 이면에 드리워진 월정리 주민들의 고통이 먼저 탐방객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지하에 엄청난 지질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활용 할 수 없는 마을. 원형보존이 더욱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2007년 이후 월정리 주민들은 이런 행정용어에 익숙해졌다. 환경영향평가, 문화재 검토대상구역, 핵심지역, 완충지역 등등. 모두가 주민들이 소유한 토지에 대한 법적 규제를 의미한다. 마을 자체가 동굴 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규홍 개발위원장의 한 마디에 모든 심정이 들어있다. "세계자연유산마을이란 것을 가져가버렸으면 좋겠다." 땅 속에 진귀한 지질자원이 들어있는 것이 그렇게 큰 죄냐고 따지는 것이다. 재산권 행사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에 속한다. 마을 총면적 6671㎡인 작은 마을에 경작지의 70% 넘는 곳이 법으로 묶여있다는 것은 마을발전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하지 말라는 통보였다는 것을 세월이 지나면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마을공동체와 주민 피해에 상응하는 행정적 조치가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인터뷰과정에서 격앙된 어조로 쏟아낸 분노를 외면하면서 제주의 가치를 높이겠다고 떠드는 것은 정책적 분칠에 불과하다. 제주의 가치를 높여준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입는 피해를 어떤 방법으로든 보상해야 한다.


마을 구석구석 오토바이 타고 누비는 어르신

설촌 연대가 흥미롭다. 용천동굴이 발견되면서 동굴 안에 병, 항아리와 같은 질그릇 16점과 철창 1점이 발견된 것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말까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탐라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이 된다. 월정리의 옛 이름은 무주리(無注里)다. 포구이름인 무주개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촌락을 형성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400년 정도. 월정리라는 이름은 한학자였던 원봉(元峯) 장봉수(張鳳秀)선생이 테우를 타고 바닷가에 나가서 마을을 바라보니 반달모양이어서 月汀里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반부터 '달이 노니는 물가'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정착된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달빛 아래 아름다운 마을이다.


'멜 잘 들민 월정, 멜 안 들민 멀쩡'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그만큼 월정리라고 하면 멸치잡이가 왕성했던 곳이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었으리라. 바닷가가 지형적으로 풍부한 조간대와 모래해변으로 형성되어 있어서일까 원담을 활용한 멸치잡이가 다른 마을에 비해 발달하였다. 놀라운 것은 제주 최초로 어업조합이 만들어진 곳이 월정리다. 마을결속력이 막강했다는 의미. 1920년까지 월정바닷가에 형성된 멸치 어장으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그 멸치를 기반으로 일제강점기 초에 지역주민들이 한모살 부근에 멸치 가공공장을 만들어서 일본에 수출했다고 하니 제주바다에서 잡히는 멸치의 집산지였다는 의미가 된다.


멜굿도 하고 무주고혼도 달래는 해신당

지금 주민 수가 700여 명이지만 당시엔 2000명이 넘게 살았다는 것은 어업에 의한 소득으로 번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에 유학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어부들이 살던 마을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후손들이 마을 발전에 공헌한 바 크고. 해안도로가 개설된 이후에 그 많던 멸치를 보기 힘들다고 하니 멸치들이 놀던 해변을 망가뜨린 것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곽기범 어촌계장이 기억하기로 70년대 초까지 한모살 부근에 큰 말뚝을 막고 1㎞ 밖 바다에서 그물로 가둔 물고기들을 잡아끌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이 밤 새워 왁자지껄 줄을 잡아당기는 소리. 바다로 나가서 잡는 멸치 포획 그물과 그 방식을 방진망(防陳網)이라고 한다. 테우나 선박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멸치를 가둬놓고 잡는 방식. 더 진화된 방식을 조직적으로 개발하여 다른 어종들도 그물로 잡아 마을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모래해변으로 줄을 당겼던 모습이야말로 축제의 희열과 같았을 것이다. 관광객이 참여하는 마을축제용 문화자산으로 발전시키기에 충분하다.


빌레위에 돌담

지금 75세 이상 어르신들은 배를 타고나가거나 줄을 잡아당기며 느꼈던 마을공동체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무형문화재가 따로 있을까? 이런 소중한 삶의 향기를 찾아 재현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행정 차원에서 이를 복원할 수 있도록 지원이 있어야 하겠다.


바다에 대한 고마움이 확연하게 녹아있는 마을이다. 해신당에서 월정리의 숨소리를 듣는다. 용왕도 모자라 선왕(船王)까지 모시고 있다. 어부와 해녀들의 안전을 관장한다. 멸치 풍어를 비는 마음에서 그물카서도 올린다. 수많은 굿의 종류가 있지만 멜굿이 행해진다니 멸치와 함께 살아온 정신세계가 느껴진다. 왼쪽은 상단, 오른쪽은 하단. 상단은 해신을 위한 제단이고 하단은 바다에서 죽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위한 제단이다.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어부들의 혼백이 쉬고 있다.


김우일 월정리장

한모살 해변 해안도로는 외형으로 번지르르 하게 발전해가는 것으로 보인다. 외지인들이 들어와 게스트하우스나 카페들을 20여 곳 만들어서 영업을 하고 있다. 마을공동체와 대부분 괴리된 모습으로. 김우일 이장의 일갈이 무섭다.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개성 빵점 건물들이 즐비할 뿐이다. 월정해수욕장과 어울리지도 않고." 이렇게 망가지기엔 월정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을 보유했기 때문에 당하는 주민들의 가혹한 서러움과 대비하여 해변의 모습을 싸구려 관광지로 전락시키는 것에 법과 행정은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닐까.


행정기관과 숱한 충돌 결과 얻어낸 현실적인 꿈이 있었다. 아름다운 농로와 자연이 어우러진 곳에 동굴이 지닌 원시 이미지를 살린 '원시체험마을'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대규모 개발이 아니라 친환경적인 접근이다. 활로를 열어줘야 한다. 세계자연유산마을이라는 이름 때문에 억울해서 못살겠다는 월정리 주민들에게 저 작은 꿈이라도 이룰 수 있도록.


<공공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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