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4)성산읍 난산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4)성산읍 난산리
  • 입력 : 2014. 11.04(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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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마을 전경(위)과 곡선이 아름다운 마을안길 풍경(아래)

"떠났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함께 살 수 있었으면…"
4·3 광풍 휘몰아치면서 100여명의 청년 희생

인재 잃은 슬픔 극복…교육열로 공동체 회복
젊은이들 떠난 자리에 80여명의 귀농인구 정착
다시 돌아오는 곳 됐으면




언덕이름들이 정겨운 마을이다. 꽝무더니, 바슬동산, 면의마루, 국제마루, 동산가름 등 그 언덕과 밭들 사이로 슬기롭게 길은 내며 세월을 이어온 마을이다. 모구리오름과 나시리오름, 유건에오름이 그 기운을 뻗어 내리고 있다. 시계방향으로 수산리, 온평리, 신산리, 삼달리, 성읍리에 둘러싸여 있다. 옛 지명은 난믜, 난미로 불렀다고 한다. 산을 뜻하는 고어 뫼를 '믜'나 '미'로 발음해온 제주인들. 그래서 蘭山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도 난초가 많기는 많았던 곳이라고 한다. 군자의 상징이라는 난초의 품격을 닮아서일까,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선비 마을이다. 지금도 한 집 건너 교육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다는 마을. 후손들에 의해서 조상님들의 유전자를 파악하게 된다. 온순한 성품을 가진 양반 유림촌이었다.

1975년 도로포장용 골재를 채취하다가 면의마루 옆에서 마제돌도끼 2점과 돌끌 1점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명확한 증거다. 목축이 중심 생업이었던 100여 년 전까지는 소낭가름지역에서 살다가 차츰 제미터, 굴집터 부근으로 이주하였고 결국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성산읍에서 제일 비옥한 토질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화학비료를 쓰기 전에는 많은 부분 토질에 의존한 농경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번성은 농산물의 소출량과 비례하였을 것이다.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마을안길의 검은 돌담과 어우러진 감귤.

이 아름다운 중산간 마을에도 4·3광풍은 몰아쳤다. 100명이 넘은 청년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에 위기가 닥쳤다. 김인수 노인회장은 다른 마을에 비해 활력이 떨어지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다고 한다. 유능한 인재들을 잃은 슬픔이 엄청난 극복의지로 작용하였을까? 지독한 교육열로 마을공동체의 위상을 복원하겠다는 묵시적인 기류가 마을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교육계, 학계, 언론계에 진출한 인물들이 엄청나게 배출된 것이다.

한 집안에서 자식농사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마을 입장에서는 양면성을 가진다.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후손들이 더 많은 세상을 만났다는 것이다. 마을공동체의 생명력이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년회원의 수의 열 배에 달하는 노인회 회원들이 살아가는 마을이 된 것이다. 정현수 청년회장의 아버지인 정길남(72)씨는 "80세가 될 때까지 노인회원 가입을 거부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특한 성격으로 보기보다 가슴 저린 난산리의 현실을 웅변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60세까지 청년이고 80세까지가 중년으로 생각하는 삶의 터전. 장수마을이라고 부르며 스스로를 달래고 또 달래는 모습이 이어질지 모른다.

시간은 흐른다. 난산리의 시간은 더 빨리 흐른다고 해야겠다. 난산리가 키워낸 인재들이 떠난 자리에 벌써 80여명 되는 귀농인구가 들어와 살고 있다고 했다. 400명이 조금 넘는 주민 수의 20%다. 마을공동체의 역사를 이어온 주민들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극복 전략을 차분하게 짜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좌절을 경험한 풍력발전시설 사업은 아픔이 컸던 모양이다. 마을목장 부지에 수익사업을 위한 풍력발전시설을 준비하고 공사단계까지 갔지만 인접한 지역 영농법인의 지독한 반대 때문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 영농법인이 올해 세월호 사건으로 세상을 경악하게 한 유병언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지자 난산리 주민들의 심정은 여러 면에서 남다르다. 인접한 이해관계 상대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태양열 발전시설 계획을 준비하면서 생산된 전력을 구매해줄 한전을 찾았지만 성산지역 변전소 용량이 충분하므로 사줄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고 한다. 제주특별자치도를 찾아가 호소하였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난산리 주민들의 궁금증은 하나다. 제주에서 생산된 전기를 제주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정녕 없는 것인가? "누구를 위한 법이냐?" 물으면 갑을 향한 을들의 욕설로 치부하는 모양이다.

건축미를 자랑하는 마을복지회관.

마을공동체의 수익사업을 만들어야 주민복지에 필요한 자구노력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현실을 오래전부터 직시하고 발버둥치고 있다고 했다. 마을소유 땅을 활용하는 큰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행정적 관심과 지원만 있으면 가능한 요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마을 중심부에 위치한 폐교 활용 여건을 조성해주는 일. 김봉의 이장은 마을 인지도 확대를 위하여 상징적인 마을만들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유기농농산물판매장을 통하여 관광자원화한다면 주민들의 농외소득은 물론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현실적인 선택.

김봉의 난산리장

난산리가 꿈꾸는 미래는 과거와 연동되어 있었다. 밖에 나가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 돌아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85세 김승균 전 난산리장은 30년 뒤에 제주시청까지, 서귀포시청까지 30분 내에 왕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유는 고향사람들이 출퇴근하면서 함께 생활할 수 있기를 염원하기 때문에. 일가 친척이 한 마을에서 살아왔던 시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만은 아니다. 이대로 간다면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보이기 때문이리라. 정현수(43) 청년회장의 격정적인 주장은 제주의 모든 마을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마을 발전은 청년들이 돌아올 수 있는 여건 마련에 그 전략적 중심이 있어야 한다." 현경산 부녀회장이 꿈꾸는 난산리의 미래에는 노인전문병원이 있는 최고급휴향마을이 그려져 있었다.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생성되는 그런 난산리을 만들고 싶은 욕심에 이런 꿈을 꾼다고 했다. 젊은 세대의 절실함이 묻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난산리의 최고 경쟁력은 아직도 원형을 잃지 않고 있는 농로길이라고 한다. 경승지 감각에서 탈피하여 힐링을 추구하는 탐방객들에게 정감어린 작은 소로길들을 아름답게 제공하는 것. 난산리는 소박함으로 승부할 수 있는 최적의 마을이다. 마을 이름이 가지고 있는 난초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부가가치를 높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번잡한 것을 피하고 싶은 고객은 충분하게 성장하고 있으니까. 마을전체가 올레코스라고 해도 무방한 마을이 있다면 난산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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