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3)애월읍 고내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3)애월읍 고내리
  • 입력 : 2014. 10.28(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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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과 고내봉(위), 고내봉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아래)

세대간 상생·소통으로 제주관광 '첨병' 자처한다
고내봉에 막혀 한라산 없는 마을
탐라시대 고내현때 설촌된 고촌
고내팔경 등 천연비경 간직한 곳
전임 이장이 개발위원장 맡아서
후임 이장에 힘 실어줘 본받을만
30년 뒤 관광단지로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로 주민들 똘똘 뭉쳐



마을 안쪽에서는 동남쪽에 위치한 고내봉에 막혀서 한라산을 볼 수 없는 마을. 흔히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조그만 해안도로를 걸어가다 보면 고내봉을 근경으로 하고 한라산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고내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더욱 일품이다. 해안도로가 개설되고 가장 혜택을 보는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 면적이 271ha라고 하지만 고내봉을 빼고 나면 농경지가 많지 않다.

그래서 예로부터 바다 중심으로 생업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노동을 한 인구가 고내리 주민 수의 갑절이나 많았다고 하니 바다 밖으로 진출하려는 의지가 강한 마을임이 분명하다. 그만큼 생각이 진취적이다. 지금도 쟁쟁한 출향인사들이 고내리의 자부심을 이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탐라시대, 고내현이 있었던 때부터 설촌 된 고촌이라고 한다. 지금은 복개 되어있지만 마을 중심부에 정천(正川)이라는 냇가가 있었다. 김순자 노인회장이 전해주는 설촌유래의 중심에는 고려 때 항파두리로 들어오는 배가 고내포구를 통해서 왕래하였다는 것이다. 마을 동쪽에 높은 지대가 있어서 바다를 조망하기에 좋은 여건이 있어서 당시 상황으로는 해상을 향한 요충지였다. 날씨가 맑은 날 동쪽 해안절벽 위 다락쉼터에서 멀리 추자도를 볼 수 있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고내포구의 일몰.

고내리는 과거에 시인 묵객들이 경승지와 같은 품격으로 바라봤던 마을이다. 하나의 마을 단위에서 고내팔경을 묶어서 전하고 있으니 놀라움이 크다. 살펴보면 경배목적(鯨背牧笛), 고릉유사(古陵遊寺), 용악아송(岳兒松), 정천유수(正川流水), 동문잉석(東門孕石), 남당명파(南堂鳴波), 손애숙구(遜崖宿鷗), 곡탄유어(曲灘遊魚)가 그 여덟 가지다. 마을의 특징들을 이렇게 함축적으로 만들어서 전했던 뜻글자 시대의 풍류가 한편으로 정겹다.

없어져버린 모습도 있다. 화석화 된 한자글귀로 되새김질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에서 다시 8개의 아름다움을 정해보는 노력도 있어야하지 않을까? 없어진 풍광을 대체할 그 무엇을 찾아. 유림들의 중국 추종형 사고체계에서 발원하는 형태의 경승지 표현법 말고 지극히 제주의 자연에 대한 자긍심 중심으로 고내리의 관광자원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난다. 영주십경에는 오름도 없고, 돌담의 아름다운 가치도 없지 않은가. 그런 견지에서의 안타까움이라고 해야겠다.

다락쉼터 방사탑 조형물.

용천수 시닛물.

독특함이 많은 곳이다. 의식구조의 단면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두 개의 당이다. 고내봉에 있는 할망당과 포구 쪽에 있는 하르방당. 밭일은 주로 여성들의 몫이었으며, 바다일은 남성들의 영역으로 여겼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한 구조가 있었다면 옛 이야기고 지금 해녀인 고송자(52)씨가 어촌계장 역할을 하고 있다. '예로부터 할망당이 높은 곳에 있고 하르방당이 아래 있었으니 여성상위시대를 고내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곳 아니냐'고 인터뷰 과정에서 폭소를 만들어냈다. 해녀답게 가장 큰 바다문제 해결에 언성을 높인다. 고내리 앞바다에 적조가 심해서 해초가 고갈되어 있다고 했다. 감태를 심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보다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생계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녀회가 제주도에서 가장 큰 헬스크럽을 고내리에 만들어서 왕창 돈을 벌어 어르신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 싶다는 김경심(57) 부녀회장의 간절한 꿈은 하루속히 밭에서 김매는 기계가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가장 지겨운 일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의사표시가 오히려 낙천적이다. 고된 노동의 일상 속에서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고내리의 여성상을 발견하였다. 이 또한 전통적 가치라고 생각하면서.

고도경 개발위원장은 참으로 멋있는 전임이장이었다. 마을 주민 사이에 있을지 모르는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후임 이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개발위원장을 맡아서 고내리 발전에 힘을 쏟고 있었다. 간혹 다른 마을에서 마을 지도부와 일부 주민들 간 견해 차이로 빚어지는 반목 때문에 미래에 대한 꿈들이 좌초되는 경우를 목격하고 있기 때문에 애향의 시작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몸소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전임 이장이 후임 이장을 위해 자신이 이장 때보다 더욱 더 열성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고내리의 경우를 본받아야 할 마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김도형 고내리장

김도형 고내리장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열어가고 싶은 고내리의 미래는 관광객들을 마을 기업의 형태로 수용하기 위한 시스템 마련이었다. 당장 닥친 일이라고 하는 읍소재지 정비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운동장과 공연장을 겸비한 시설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1만4000 평의 마을 부지가 투입되는 이 사업에 공유수면과 인접하고 있는 환경적 요인을 활용하여 해수사우나, 해수풀장 등을 기필코 만들어야 한다며 야무진 꿈을 피력하고 있었다.

송시종 청년회장의 미래에 대한 꿈은 실질적인 수익사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내봉 둘레길을 활용하여 즐기는 관광자원을 만들어서 마을공동체의 수익사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젊은 세대답게 역동적인 마을사업으로 관광객을 수용하자는 것. 세대 간에 궁극적인 지향점은 같았다. 30년 뒤 고내리는 하나의 관광단지처럼 변모해 있을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가겠다는 굳은 의지로 뭉쳐있었다. 모든 관광객의 욕구가 고내리에서 충족되는 세상을 향하여 줄기찬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의지. 외국인 관광객들도 감동하는 그런 관광단지를 만들기 위하여 주민들이 모여 외국어 회화까지 공부해두자는 소박한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고내봉에 막혀서 한라산을 볼 수 없다던 마을. 지금은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의 의식 수준이 이미 고내봉 정상에 올라 시간적으로 먼 미래를 뚜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라산만 바라보는 섬개구리 근성을 어쩌면 가장 먼저 휴지통에 던져버린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을 기회로 만들어가는 고내리 사람들이 무서운 속도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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